서양 현대 건축 양식 사조 가운데 건물을 일부러 찌그러진 모습으로 만들려는 해체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체코의 프라하에 있는 Fred and Ginger 빌딩이 그 중 하나입니다. 인위적 질서 중심의 가치관과 정형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현실에 대해 일종의 비판적 시각과 거리 두기를 반영한 건축 양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위적 가공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의 정형화된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은 미 가공된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활용하면서도 멋과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예컨대 개심사의 범종각이나 청룡사 대웅전에 사용된 휜 나무는 현대의 인위적 질서와 서양의 효율성이라는 가치관에서 볼 때는 불안해 보이거나 흉해 보일지 몰라도, 곧은 나무와 다름없이 기둥으로써의 구조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습니다. 비정형적인 질서로 가득 차 있는 자연이 굳이 곧은 것만을 쓸모 있는 것이라고 바라보는 편견에 대해 비웃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날 장인들은 뒤틀리고 휜 나무도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곧거나 휘거나 나름대로의 제 몫이 다 있다는 넓은 생각을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 초석을 놓는 데에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덤벙주초'라고 해서 자연상태의 돌을 그대로 가져다가 기둥의 기초에 쓴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산에 박혀 있던 울퉁불퉁하고 모난 돌을 가져다가 다듬지 않고 초석으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안정성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휜 나무나 마찬가지로 구조적 안정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둥의 밑동이 박히는 부분을 다듬어 맞게 끼우는 최소한의 작업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휜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자연석을 있는 그대로 초석을 삼는 것은 전혀 세상의 눈이나 표준화된 기준을 따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안에는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사물들은 다 나름대로의 가치와 쓰임새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를 설명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점에서 그 비유들은 단지 겨자씨나 누룩의 커지는 성격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원래의 성질에 예수님은 더 관심을 두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비록 존재가치가 부각되지 않았지만 전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던 가난하고 소외된 겨자씨와 누룩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하늘의 복을 받는 나라, 그래서 모든 이들이 사람다운 인정을 받는 나라, 길가에 피어난 풀잎 하나에도 그 의미를 붙여 주는 참된 생명의 나라, 바로 그 나라가 주님이 이 땅 위에도 자리 잡기를 소망한 하늘의 나라라고 가르쳐 주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세상에 이름 없이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라도 똑같은 사랑과 은혜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온전하지 못한 휘고 모난 나무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덤벙주초처럼 하늘의 나라를 세우는 초석으로 세워가실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됩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버클리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2년 8월 30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