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설치지 마라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문제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종교를 꼽는다면 단연 개신교라는 사실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 개신교는 배타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교세가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통계보고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유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교회의 활동과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이 전체가 아닌 일부로만 세상에 도드라지게 알려진 까닭입니다. 그래서 일부의 생각과 방침이 마치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듯 세상에 비춰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는 비단 교회 밖 세상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생각의 차이에 따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에 대한 이견만 보더라도, 한편에서는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신앙과 선교방식을 독선이 빚어낸 아집이라고 비판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절대적 복음 앞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의 연약함은 타락의 결과요 믿음의 부족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회의 신도들조차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이 옳은 길입니까?"와 같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단의 질문 이전에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라는 성찰의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옳고 그름을 가르기 위한 논쟁은 결국 쉽게 해결되지 않을뿐더러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둘째, 대개의 경우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과 정신의 차이가 만든 문제라기보다는 접근 방법의 차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곧 본질의 문제가 아닌 비본질적인 논쟁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뜻과 생각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믿음의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세상의 이치로 볼 때는 무엇이 옳고 그름이 분명할지라도, 하나님의 이치, 곧 사랑의 마음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복음서의 삭개오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 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관심을 두고 볼 대목은 삭개오가 어렵사리 만난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 있었던 많은 동네 사람들과 삭개오, 이 두 부류의 인간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를 에워싸고 직접 대면했던 여리고의 동네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학수고대하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자기들 사이에 혹은 자기들 뒤에 또 다른 사람 역시 예수님을 만나려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바라보며 마주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만 기뻐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여있던 사람들이 무슨 악의를 갖거나 속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본의 아니게 삭개오와 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 우리의 시선을 돌려 오늘 현실에 견주어 볼까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음성을 한 번이라도 듣기 위해 갈급한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들 사이에 여전히 삭개오와 같은 이들이 저 먼발치에서 예수님께 다가서려 하는데도 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족하느라 독점하는 줄도 모르고 삭개오와 같은 이들이 나오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찮습니다.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보고 기특한 나머지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 뜻은 예수께서 갈급한 삭개오의 영혼을 찾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삭개오의 입장에서 이를 받아들인다는 건 결국 주님을 자신의 영혼 가운데 영접하는 상황이기도 한 매우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헌데 이렇게 한 영혼이 주님을 영접하는 복된 순간에, 주님을 보느라 뒤에 있던 삭개오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주님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비춰 볼 때 죄인의 집에 머무는 자는 그 죄인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기뻐했던 사람들이었건만, 결국은 자신들의 전통으로 삭개오를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낙인 찍고 졸지에 그리스도마저 죄인 취급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흔히 말하듯 '그건 신앙도 아니야' 혹은 '네가 믿는 하나님은 잘못된 거야'처럼. 나에게 구원자일 수는 있어도 너에게는 결코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믿는 신앙만이 진짜 믿음이라는 그들의 자만이요 독선의 결과였습니다.

제가 "누구의 잘못인가" 그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성찰이 중요하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나 삭개오. 주님을 만나려 하는 그 마음은 한결같았고, 그 방법 또한 굳이 누구의 잘못이라 이야기하기가 매우 곤란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어렵사리 만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영접했던 삭개오를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함께 기뻐하면 됩니다. 죄인이 주님을 만나 영혼이 구원된 기쁨의 순간 아닙니까? 삭개오 역시 본의 아니게 자신의 길을 막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도 십분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도 언젠가 그들처럼 그 무리에 속해 있을 때, 지난 날 자신처럼 뒤에 서 끼어들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여기에 누구의 잘못을 지적할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의로운 시선을 갖고 사는 자가 되기 위해 "멋대로 설치지 마라"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합 2:4).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제 멋대로 남의 모습을, 남의 신앙을, 남의 마음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여 그 뜻을 그저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판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믿음은 비방과 비난을 낳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희락을 낳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사람들 눈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가 구원을 얻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상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 교회들이 찾아야 할 진정한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버클리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3년 9월 20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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