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꿈이나 꾸고, 늘어지게 누워서 잠자기나 좋아한다.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그 도적들이 입은 살아서 "오너라, 우리가 술을 가져 올 터이니, 독한 것으로 취하도록 마시자. 내일도 오늘처럼 마시자. 아니, 더 실컷 마시자"하는구나." <이사야 56:10-1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난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심정은 일종의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진 자들이 일방적으로 득세하고, 갖지 못한 자들은 계속해서 착취와 억압을 받는 사회. 그러나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저항하는 세력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추구해야 할 사람들 마저 현실에 수긍하고 동화 되어 가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대 80의 사회, 즉 20%의 소수 계층을 위해 나머지 80%가 헌신하는 사회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잘 압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기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주인으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참 정의를 누릴 수 있다는 민주주의 이념은 분명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시민들의 대표자이자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소명과 역할, 그리고 민주주의 이념의 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이해를 위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품었던 기대는 한낱 이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고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맹자가 위나라 양혜왕을 만나러 갔을 때 왕이 그를 반기며, "선생께서 이리 먼 길을 찾아 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오셨겠지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밑의 영주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에 이익이 될까 하는 생각만 할 것이고, 신하나 일반 서민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듯 위 아래 모두 서로 다투어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공의가 바로서야 나라 역시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왕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8장 15절에 보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세"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서는 그런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공의로운 왕이라 불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기 전에 모든 영광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공의는 곧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며, 공평한 존재인 백성들을 공의로서 다스린다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의 언약을 받은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의의 말씀은 결국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임을 알려줍니다. 작은 이익을 넘어서 서로 간에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는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와 이해관계로 공의가 무너져가는 오늘 우리 사회가 다시 하나님의 공의를 가슴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와 함께 우리 민족이 세워가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 또한 이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버클리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2년 11월 29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