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의 시 가운데 <걸레>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합니다.
"바람부는 날/ 바람에 빨래 펄럭이는 날/ 나는 걸레가 되고 싶다/ 비굴하지 않게 걸레가 되고 싶구나/ 우리나라 오욕과 오염/ 그 얼마냐고 묻지 않겠다/ 오로지 걸레가 되어/ 단 한군데라도 겸허하게 닦고 싶구나"
더러워서 걸레가 아니라 더러운 것을 닦아서 걸레가 된 것이니, 본디 걸레는 처음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 용도와 목적에 따라 그렇게 불릴 뿐입니다. 시대의 아픔과 세상의 불의하고 부정한 모습을 보았던 고은은 그래서 차라리 걸레가 되는 편을 택했던 것입니다. 시인 임인규도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걸레에 비유하여 표현한 바 있습니다. 자식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그 몸 다 헤어질 때까지 가려주시고, 지저분한 것은 다 닦아주시니 어버이의 그 사랑이 꼭 걸레와 같다는 겁니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죄악을 닦아내신 그 모습을 마치 걸레질 하는 것에 비유할까 합니다. 때론 하나님도 걸레를 손에 드셔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패한 성전을 청소하기 위해 회초리를 드신 것처럼, 하나님 또한 걸레를 드시고 이 세상의 더럽고 추한 곳곳을 깨끗게 하십니다. 세상을 성결케 하는 걸레라는 의미에서 이를 '거룩한 걸레'라 부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깨끗게 하기 위해 드신 거룩한 걸레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세상의 죄악을 닦기 위해 사용하신 거룩한 걸레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라는 거룩한 걸레를 사용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의 보혈을 통해 적셨습니다. 그 피로 세상의 죄와 허물을 다 닦아내신 겁니다. 그 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순결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걸레로 닦아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주님은 차라리 "헐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선 직후 가장 먼저 행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임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민족의 뿌리나 다름없는 성지입니다. 주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이후 오랜 세월을 거쳐서 세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긍심이자 경건함의 상징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니 이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는 말씀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불경한 언사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허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성전의 곳곳이 여전히 거룩한 걸레로도 닦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닦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닦이고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걸레, 곧 십자가가 있는 곳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적신 십자가가 성전의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있을 때 성전은 하나님의 집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계시다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걸레가 메말라 닦을 수 없을 정도로 낡아 버리거나, 아예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이상 그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닦아주신 십자가가 없는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이 살아계신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니 허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바로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도 거룩한 걸레인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를 닦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신 성전인 우리 안에 거룩한 걸레가 더 이상 쓸모 없을 만큼 폐기 처분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그냥 좀 버텨보자는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만일 이런 자신을 향해 누군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저주라도 퍼부으려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혹 예수님 말씀대로 차라리 '허무는 편'이 낫다는 조언을 들어도,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쉽게 내려놓거나 허물기는 매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의 능력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기로 작정하신 이상, 닦이지 않는 것들은 어떻게든 허물어서라도 다시 세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 또한 십자가의 거룩한 걸레로 우리 스스로를 닦아내는 자정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에게도 허물어지는 순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주님은 분명 깨끗한 새 날을 열어 우리를 축복하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걸레가 우리를 닦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겸허히 내어 드리는 겁니다. 그 분이 우리 안을 깨끗이 청소하실 수 있도록 그저 순전한 마음으로 내려놓는 겁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버클리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3년 11월 14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