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목요일, 큰 아이, 홍원이가 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어 일리노이 주립대학이 있는 어바나-샴페인을 다녀 왔습니다. 샴페인으로 가는 길은 1995년 1월 그곳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갔던 그 길이었습니다. 당시 네 살 먹은 아이와 아내, 달랑 세 식구가 짐이랄 것도 없이 작은 차 트렁크에 모두 실리는 이삿짐을 싣고 시카고에서부터 샴페인으로 가던 140마일의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던지,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광야 같은 샴페인을 향해 떠나는 아내의 심정은 아마 내려 가는 내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5년을 그곳에서 사역한 후에 3년 전에 시카고에 다시 올라왔는데, 이제는 21살의 청년이 된 아이를 데리고 다시 샴페인으로 내려가는 길은 정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8년 전에는 그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왜 샴페인에 가는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정한 대학교 전공과 자신의 살아야 할 아파트까지 스스로 정하는 온전히 독립된 어른의 모습이 되었으니, 감사하고 자랑스러웠으나 애틋함을 숨길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돈을 아낀다며 친구가 살고 있는 허름한 아파트의 옆방을 정한 방에 짐을 내려주면서 부모로서 안쓰러움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학교 한 가운데 있는 곳이라며, 공부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곳이라는 아이의 말에 오히려 제가 위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가난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님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아이가 점점 어른이 돼 가면서 그 가난으로 인해서 세상을 더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마음속의 기도를 대신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아이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침대며, 작은 카펫 등등 생활에 필요한 것을 아이와 함께 사면서 이제는 진짜 아이를 내 품에서 보내는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짠하여 왔습니다. 새벽부터 떠나 보내는 아이 생각에 눈물을 보이던 아내는 드디어 헤어지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아이를 끌어 안고 울기 시작합니다. 눈물 없이 말 없이 서있는 저보다는 아이를 끌어 안고 울어주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마음속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지체되어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둘째가 집에 있어서 'Empty Net' 증세로 아내가 어려움을 겪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저 또한 위안을 삼고 있으며 말입니다.
마지막 아이와 헤어지면서 아이를 끌어 안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 홍원이를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이 이 아이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인도해 주심을 믿기에 저희는 안심하고 돌아갑니다. 어려울 때마다, 기쁠 때마다 주님과 늘 동행하며 살아가는 홍원이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곤 목사 아버지로서 그곳에서의 교회 생활과 신앙 생활에 대하여 당부하였습니다. 새벽기도는 가능하면 꼭 참석하여 새벽 생활에 적응할 것과 교회에서 중 고등부 교사로 섬기며 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위한 당부였습니다. 제 목회 경험으로 새벽 제단을 쌓는 자와 교회를 섬기는 자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풍성하게 채워주셨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내는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마다 나중에 우리 아이도 대학에 가면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 이렇게 대접을 받을 것을 믿으며 대접하곤 합니다. 그렇게 18년의 세월을 살아 왔기에 이제는 누군가의 대접을 받게 될 아이를 기쁨으로 보내게 되었는가 봅니다.
15년 동안 눈물로 씨를 뿌렸던 그곳에 아이를 보내며,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라는 시편 126편의 말씀이 계속해서 제 마음 속에서 감격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이를 데려다 주기 위해서 오가는 길에서 주신 하나님의 위로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가난한 목사의 자녀이지만, 믿음만은 부자로 살아가는 믿음의 유산을 넉넉히 받는 자녀이기를 소원해 봅니다.
글쓴이: 윤국진 목사, 시카고예수사랑교회 IL
올린날: 2012년 8월 27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