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감리교 선구자들을 아시나요?

“연합감리교회에 물어보세요(Ask The UMC)”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감리교 역사의 선구자인 두 분의 한인 감리교인을 소개한다.

한국(조선)의 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양주삼 목사는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사진 제공,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부; 그래픽, 로렌스 글래스, 연합감리교뉴스. 한국(조선)의 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양주삼 목사는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사진 제공,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부; 그래픽, 로렌스 글래스, 연합감리교뉴스.

양주삼 목사(1879-1950?)- 최초로 안수받은 한인 감리교 목사이자 초대 감독

“한국(조선)의 애스베리”로 불리는 양주삼 목사는 미국의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두 개의 조선 감리교회를 통합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한국(조선) 최초의 감리교 감독이 되었다.

1879년 1월 25일 평안도에서 태어난 양 목사는 우연히 접한 미국 선교사들의 책을 통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01년 그는 중국 상해에서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중서서원에 입학했고, 그 학교의 교장이었던 파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중서서원을 졸업한 그는 1905년 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한인교회의 전도사로 섬기다 1910년 목회자가 되기 위해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밴더빌트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준회원 안수를 받아 양 목사는 한인들 가운데 최초로 안수받은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밴더빌트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계속 학업을 이어가다 남감리회 선교사들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여 조국인 한국(조선)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양주삼 목사는 1915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수학한 조선인 교수였다.

양주삼 목사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150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수천 명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1927년 양주삼 목사와 허버트 웰치 감독은 미국의 북감리교와 남감리교의 선교를 통합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양주삼은 통합된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초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 중 대한 적십자사의 총재로 의료품과 구호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피난하지 않고 남았다가 북한군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박에스더는 미국 여성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조선)의 의학과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사진은 미 북감리교 여선교회 해외선교회 소속 로제타 셔우드 홀이 1900년경 찍은 사진.박에스더는 미국 여성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조선)의 의학과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사진은 미 북감리교 여선교회 해외선교회 소속 로제타 셔우드 홀이 1900년경 찍은 사진. 

박에스더(1876-1910)- 최초의 한국 감리교 여자 의사

박에스더는 1876년 서울의 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들 위한 교육과 의료 시술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여성들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규범이 서서히 바뀜에 따라 박에스더는 의료분야의 여성 선구자가 되었다.

박에스더의 아버지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 밑에서 일하던 중, 북감리회의 여선교회 해외선교회(WFMS)에서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11살인 에스더를 그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화학당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북감리교 선교사였던 프랭클린 올링거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녀의 본명은 “김점동”이었는데, 세계를 받은 후 세례명으로 "에스더"라는 이름을 받았고, 남편과 결혼한 후 남편의 성을 따라 박 씨로 개명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박에스더는 미 북감리회 여선교회 해외선교회(WFMS)의 지원을 받아 메리 스크래튼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여성 병원인 부구녀관(현 이화여대병원)에서 미국인 의료 선교사인 로제타 홀의 통역을 담당하며 수술을 보조했다.

처음에 에스더는 보조 외과 의사가 되는 것을 망설였다. 하지만 로제타 홀 의사가 치료가 불가능해 보였던 구개열 수술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의학을 공부해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 먹게 된다.

그녀는 17세가 되던 해 홀 박사의 중매로 박유산과 결혼하고,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한 최초의 한국(조선)인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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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남편 박유신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했는데, 남편 박유신은 그녀의 학업을 돕기 위해 농장에서 일하다 안타깝게도 박애스더의 졸업을 불과 3주 앞두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1900년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인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어 봉사했다. 그녀는 조선에 도착한 후 첫 10개월 동안 3,000명 이상의 환자를 돌보았고, 10년 동안 계속해서 의술을 베풀다 1910년 4월 13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미국 여선교회 해외선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던 박에스더는 최초의 한국(조선) 여의사이자 교육의 선구자로 기억된다.

이용연 목사는 시카고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뉴욕 연회의 정회원 목사으로 코네티컷주 브리스톨에 소재한 Prospect UMC를 섬기고 있다. 

이 글은 이용연 목사의 글을 일부 수정 편집했으며, 한인 감리교 선구자 두 분을 선정하는 데 이상윤 목사의 조언을 받았다. 두 분께 감사를 표한다.

영문으로 보기Who are Korean pioneers in Methodis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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