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한다. 이것만큼 달콤한 언어가 또 어디 있을까?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하니 기가 막힌 조합이다. 마치 두 남녀가 행복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미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 것인가? 모든 일이 다 말처럼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복을 위하여 살다가 행복하지 못하니 이혼을 하고 다시 다른 행복을 찾으려는지? 또 행복하여 사는 인생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인생이 행복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 얼마일까? 사는 것이 꼭 행복만을 위하여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 행복이라는 말로 사람을 속이지 않았으면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만큼 행복의 기대치는 높아질 것이고, 그 기대치가 높아지는 만큼 심리적 불안감은 상응할 것이고, 그 행복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부정적 현상은 결코 낙심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나친 행복의 남발은 오히려 불행을 잉태하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
어느 여자 목사가 자신은 행복을 위하여 살지 않고 거룩함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였다. 행복을 위한 가정이라면, 행복하지 않을 경우 그 결과는 자연히 이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을 위한 것이라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참고 기다리고 인내할 것이다. 오히려 행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참고 견딤을 통하여 더욱 존엄한 삶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감동이 있고,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고, 진정한 행복이 있을 것이다.
거룩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존재의 무게감을 느끼며 산다는 것일 게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행복해 하는 것이지, 자신이 행복하기에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행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렇기에 사람은 존재의 가치를 느낌으로 행복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행복하지 않아도, 아픔이 있어도, 장애가 있어도, 그 가운데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기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순절기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다시금 묵상하면서 경건한 시간을 보내는 때이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한다는 것은 미련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픈 사람에게는 아픈 사람이 위로가 되는 법이다. 행복하지 못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아픔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 조금이나마 동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잘못도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응답이기도 하고 숨은 행복이기도 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아 보여 행복하자고 말을 하는 것보다 행복하지 못함 속에서도 사람답게 살자고 하는 것이 오히려 존재감을 높여주는 행복일 것이다. 행복은 결코 말에 있지 않음을 본다. 오히려 행복을 말하면 말할수록 더 불행해질 수 있음을 내다본다. 인생은 행복만이 아닌 거룩함과 같은 것으로 사는 것일 수 있음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글쓴이: 이선영 목사, 덴버연합감리교회 CO
올린날: 2013년 3월 11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