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Jesus turned and saw them following him and said to them, "What are you looking for?" They said to him, "Rabbi" (which translated means Teacher), "where are you staying?" He said to them, "Come, and you will see." So they went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they stayed with him that day. It was about four in the afternoon. (John 1:38-39)
해방신학자가 WCC 모임에서 억압과 해방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하나님은 부자들과는 함께 하시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한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연설이 끝나고 질의응답시간이 되었다. 청중 하나가 일어나 질문했다. "신부님, 강의가 참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개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부자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집이 네 채나 되어 계절마다 휴가를 가신다고 들었는데 신부님은 부자입니까? 가난하십니까?"
감독이 정치에서의 기독교인의 역할에 대해서 감동적인 연설을 마쳤다. 학생 하나가 일어나 물었다. 감독님은 집이 여러 채이고 학생들에게 세를 주었는데 이번에도 또 올리셨더군요. 왜 올리셨습니까? 가난한 학생들에게 그렇게 집값을 올려도 되는 겁니까?
두 경우, 아무리 옳은 말을 했어도 그들의 삶은 자신들의 말을 송두리째 뒤집고 말과 행동이 달라 믿음을 잃고 말의 힘을 잃었다. 그런데 오늘 두 제자는 예수가 사는 곳을 보고 가서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고백한다. 메시야를 보았다고.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믿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살아가는 능력, 가서 보고 반응하고 또 그 힘으로 서로 연관지어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나도 이런 글을 쓰면서 늘 반성한다. 앞의 두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변화를 외치고, 개혁을 말하지만 자신의 내부로부터 혁명을 시작하는 지도자들은 흔치 않다.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말은 쉬워도 사는 집,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면 금방 들통이 날 말들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원하나? 어디 사십니까? 어떻게 사십니까? 와서 보라. 가서 보고 그들은 믿었다. 얼마나 단순명료한 부르심과 응답인가? 그런데 우리네 삶은 너무 복잡하다. 아니 복잡하게 꼰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진리는 단순하고 심오하다. 하지만 진리를 받는 우리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얄팍하다. 우리 삶이 우리를 배신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베 꽈서 감추려 한다.
전도를 원하는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는가? 사람들에게 와서 내가 사는 모습을 보라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 몇이나 될 것인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도 아셨다. "말세에 믿는자를 볼 수 있겠는가?" 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말은 하늘에 삶은 땅에 떨어져 있는 한심한 자들을 돌아 보아 주소서!
글쓴이: 홍석환 목사, RISEM 지방감리사
올린날: 2013년 1월 7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