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들이 많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지옥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모를까, 눈 앞에 펼쳐진 천국을 바라보며 건너가지도 못하고 그저 끝없는 고통을 맞이해야 한다는 상황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지옥에 대한 성서의 묘사입니다. 천국과 깊은 구렁텅이 하나로 갈라져 있는 지옥의 모습은 아마도 부자가 세상에서 보인 과오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빤히 보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자에게 주는 가장 큰 형벌은 바로 저 너머 천국이 보이는데도 건너지 못하는 장벽이었던 겁니다.
생전에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커다란 대문이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어서는 그들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구렁텅이가 막고 있습니다. 문은 닫음으로써 안과 밖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열어 놓기만하면 언제든지 서로가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구렁텅이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단절의 상태를 뜻합니다. 서로 바라볼 수는 있으되 결코 넘나들 수 없는 소통 불능의 상태인 셈입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는 우리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더 무서운 건 바라보면서도 대응하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반응을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죽은 시체는 결코 어떤 상황에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은 살아 있는데 세상에 반응하지 않는 경우에 진정 살아있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바로 자기 집 문 앞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나사로를 보면서도 자신은 호사를 누리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부자는 그런 면에서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살아있는 산 자의 나라입니다. 죽은 자는 결코 들어설 수 없는 나라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빤히 바라보면서도 나사로가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자의 죄는 무슨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에게 몹쓸 짓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나사로에게 아무런 관심과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빤히 보이는데도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그 경계를 건너려 하지 않은 겁니다. 스스로 구렁텅이를 만들어 넣고 경계를 세워버렸습니다. 때문에 사람이 반응하는 것을 잃어버렸으니, 살아도 산 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었으니, 하늘나라에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혹시 우리들 사이에도 서로를 경계짓는 구렁텅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함께 호흡하며 사는 이 땅에서 아직 제대로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가는 이웃은 없나요?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무심하게 눈길 조차 주지 않았던 이웃이 여전히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지옥에는 문이 없다는 말씀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행여 우리도 모르는 새 서로의 사이에 깊은 구렁텅이를 파고 영혼이 죽어버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버클리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3년 10월 3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