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이 불안하다. 북한이 금방이라도 군사적인 도발을 감행할 것 같아 우려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의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제재결의다. 또 다른 하나는 3월 11일부터 시작된 한미 연합군사 훈련이다. 북한은 "키 리절브 훈련"(Key Resolve Exercise)라는 이름의 정기 연합군사훈련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문점에 있는 남북 직통전화가 단절되었고 북한 노동 신문은 북한 군인들의 훈련모습 사진을 게재했다.
한국 신문은 "북한, 주민 총동원 "전시태세" "김정은 명령만 기다려" 등의 제목으로 북한의 긴장 상태를 전한다. 이 소식을 들은 재외 동포들은 걱정이 많은데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다. 북한의 이런 위협적인 태도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없이 반복된 행동이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사실 무시해도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외에 사는 한인들은 가족과 일가친척 그리고 친구들이 사는 한국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쪽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되는 경우는 드물다. 전쟁 당사자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비록 오해로 인하여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두 나라는 전쟁을 피할 길을 찾아야 한다. 이번 일도 그렇다. 비록 북한의 잘못이 크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한과 미국의 지도자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철이 덜 들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싸우는 어린 아이들처럼 남북한의 긴장 관계가 계속된다면 모두 어리석을 뿐이다.
어릴 때 친구들과 싸운 적이 있다. 땅 따먹기 놀이를 하다 싸웠다. 정확하게 싸운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다. 열심히 싸우면서 땅을 많이 따 먹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가려면 아쉬웠다. 아무리 땅을 많이 따먹었어도 집에 갈 때는 그대로 두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싸울 가치가 전혀 없는 일로 싸웠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오늘날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똑 같은 실수를 한다. 전쟁에 이겨도 손해가 막심하고 아무런 유익이 없는데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이기려고 덤빈다.
어른들로부터 평화를 기대하기 어려운데 아이들은 오히려 인종과 이념을 초월하여 쉽게 다른 아이들과 친구가 된다. 권정생 님이 이런 시를 썼다. "아이들이 가는 곳은 언제나 꽃 피는 봄이라네/ 아이들 세상은 언제나 꽃 피는 봄이라네/ 어른들은 언제나 어둡고/ 어디서나 꽁꽁 얼었고/ 핵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얘기하지 어두워/ 어두워/ 허리가 잘렸어도/ 아이들은 자라고/ 철조망이 막았어도/ 아이들은 자라지/ 남쪽에도 북쪽에도 꽃처럼 자라는 아이들/ 아이들이 가는 곳은 언제나 꽃피는 봄이라네."
자라면서 부모님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어떤 때는 밤늦게까지 두 분이 화해하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 두 분이 싸우는 이유는 이랬다. 어머니는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하셨고 아버지는 절약이 삶의 모토였다. 농사를 짓고 나면 어머니는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피땀 흘려 지은 수확을 헤프게 다른 사람에게 주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눈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자라면서 배가 많이 고팠던 아버지는 먹을 것이 떨어져 자식들을 굶길까 걱정 되었던 것이다.
집사람과 32년 이상 같이 살면서 종종 싸웠다. 대단한 문제로 싸운 것 같지 않다. 결혼 초에도 자다가 싸웠는데 왜 싸웠는지 지금도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일기장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써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기록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이곳에 이사 올 때도 다투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충돌이기를 바란다. 이제는 전혀 싸우고 싶지 않다. 사랑할 시간도 많지 않은데 가치 없는 다툼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아내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갈 생각이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도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바울은 예수가 이 땅에 평화를 가져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ellipsis; 그 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에베소서 2:14-16). 예수가 화해의 중재자가 되셨단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바보가 되고, 손해 보고, 양보하고, 목숨까지 바쳐야 된다. 평화를 원한다면 누군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성경은 창조주와 인간 사이의 평화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깨졌다고 말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가 이 땅에 왔다.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드려 창조주와 인간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전쟁아! 안녕!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려무나." "오 주여, 우리를 평화로 도구로 사용하소서."
글쓴이: 김용환 목사, 북부보스턴한인교회 MA
올린날: 2013년 3월 20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