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디아스포라의 내러티브

디아스포라는 원래 흩어진 유대인을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한국인으로서 전 세계에 흩어진 사람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고국을 떠난 디아스포라와 동일시됩니다. 그 인구는 실제 한반도에 거주하는 인구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그 수가 많고,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탈식민지화 운동이 시작된 시기의 이민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
한국인의 글로벌 디아스포라 현상은 최근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현상입니다. 약 780만 명에 달하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동북아시아로 확산된 것은 식민지 시대의 빈곤과 불의에 저항하고, 새로운 생존을 위한 미래 지향적인 대안으로 추진된 것입니다. 중국은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지방 분권과 자치구를 선택하여 한인 디아스포라를 위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질병 및 식민지 폭압은 중국 내 한인 디아스포라에 가혹한 상황이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억압받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내 한인 디아스포라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워 식민 지배에 맞서고 독립을 옹호하는 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또 중국의 많은 도시가 일본 식민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주권을 지키고 새로운 독립 정부를 세우려는 열망으로 강력한 종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기독교 운동은 중국 만주를 선교지 중 하나로 지정하고 한인 교회를 설립했으며, 교육을 통해 미래 세대를 문맹에서 해방시키고 그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교육 운동을 중심으로 강력하고 조직적인 한인 운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신앙은 조선족 사이에서 각성, 교육, 공동체 정신 함양의 중심이 되었고, 그들의 정체성은 강한 반식민주의와 독립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의 독점적이고 배제적인 정책으로 인해 고려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북한 접경 지역에서 2~3세대 동안 살아갔으나, 80여 년 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및 추방되어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뒤흔든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가 살았던 두만강 이북의 하산과 블라디보스토크는 고려인 사회의 중심지이자 교육과 민족해방운동의 전초기지가 된 중요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제 이주 동원령으로 그들의 뿌리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로 옮겨졌고, 그들은 뿌리를 뽑혀 황량한 땅으로 내던져진 눈물겨운 역사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최근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농업 지역으로 이주를 제공하고, 한국과의 교역을 통한 경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등 흩어진 고려인들의 재정착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는 매우 분산되어 있습니다.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지정학적 연고와 이념적 친밀감, 그리고 우정은 러시아 사회에서 깊은 연대를 유지해 왔으며, 주로 농업에 종사했던 이들은 대를 이어 고려인으로서 다양한 공동체 의식과 경제를 유지해 왔습니다. 이는 스탈린의 강제 추방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던 잔인한 현실과 눈물이 반영된 것입니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미주 정착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이민의 역사는 감리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인천과 중부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초기 이민은 대체로 감리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심이었습니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미국 정착이 농업 이민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본래 성격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의 삶의 현실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향한 생존의 꿈이자 일본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탈식민주의적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해외에서의 지속적인 정치적 반식민 운동은 중요한 고백과 연대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먼 타국,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태평양 건너에 정착해야 했기 때문에 뿌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것은 후손들에 의해 끊임없이 질문받는 뿌리이기도 합니다.
감리교 선교사 존스가 처음으로 노동 이민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후 감리교 공동체는 하와이 전역에 여러 기도 센터와 예배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벼농사에 익숙했던 그들에게 아열대 기후와 사탕수수밭의 가혹한 노동은 눈물 마를 날이 없게 했습니다. 독립과 새 삶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기도는 고통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고향을 떠난 그들의 마음은 그리움과 고독의 향수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 강가에서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통함은 사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과 그리움을 담아 태평양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과 같았고, 그것은 그들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와이에는 30여 개의 기도처와 작은 신앙 공동체가 있었으며,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과 민족 교육을 위해 모인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모임은 신앙으로 연대와 결속을 다진 결과였습니다.[1]
교회는 언제나 지역사회 전체를 통합하고 이끄는 사회적 구심점 역할을 해왔으며, 새로 입국한 한인 디아스포라를 환영하고 환대하며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귀 기울이고 교육과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는 공동체적 역할을 해왔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신앙 중심의 예배 장소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심을 잡고 한인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복합적인 임무를 수행해 냈습니다.
한인연합감리교회는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 농업사회와 감리교 신앙공동체의 이민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인 디아스포라 중 미주에 처음 정착한 이들이 대부분 농업을 목적으로 한 이민자였다는 점은 역사적 담론의 한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농민을 중심으로 씨를 뿌리고 가꾸며, 수확하고 경작하는 생산과 공급의 공동 상속 담론이 초기 공동체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착한 한인 디아스포라를 환영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귀 기울이며 교육과 사회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필요를 제공하는 공동체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신앙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구심점이 되어 한인 디아스포라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초기 이민자로서 한인 디아스포라는 낯선 땅에서 어렵고 척박한 삶을 감리교 신앙으로 이겨냈고, 그 신앙은 지금까지도 변화된 사회 문화 속에서 강한 영성과 기도 생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후 산업 변화와 노동 인구의 변화로 인해 하와이에서 본토인 로스앤젤레스(나성), 샌프란시스코(상항), 뉴욕, 시카고 등으로 재정착하게 되면서, 그들의 사회적 환경과 역할은 더욱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초기 이민자들의 가족, 유학생, 주재원 등으로 확산되면서 사회적 역량도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이민자 공동체의 모태가 된 교회가 한인 기독교 운동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갖고 계승된다는 사실은 매우 소중합니다.

근대화와 식민지 열강의 정치, 사회적 변화는 이민자 공동체 확산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일제 식민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동기는 초기 영성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이 낯선 땅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 소외, 외로움, 차별의 현실을 눈물로 함께 나누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눈물과 해방의 담론은 애통과 해방을 모두 담은 신학적 그루터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개인 구원과 사회적 성화를 균형 있게 가르쳤던 감리교 신앙 지평의 자연스러운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흙더미에서 건져내시고, 쓰레기와 함께 버려진 비참한 자를 구해내셔서 귀한 손님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사람들 가운데 영예로운 자리에 앉히신다." (시편 113:7-8)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며 미주 이민 사회를 지탱했던 감리교회의 신학적 유산은 해방 전후로 다양한 공헌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과 인민공화국 초기, 미주 한인 감리교회의 지도자들은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을 가진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에서는 긴장, 반목, 분리, 갈등이 발생했고, 그 결과 초기 탈식민지 시기의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해방을 위해 일하고 지원했던 남북한 사람들은 민족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를 겪게 되었고, 디아스포라에 속한 사람들은 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미주에서의 정치적 디아스포라는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으며, 미군정 이후 미국식 민주주의 원칙을 중앙 정치 이념으로 삼은 대한민국은 미국 내 기독교인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 친미적 성향을 보이며 현대사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한편, 일부 한인 디아스포라는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사역을 이어갔지만,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북한의 형성과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 이들도 많습니다. 김창준 목사는 가렛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00년 전 시카고에 최초의 연합감리교회를 개척한 초기 신학자였으나, 귀국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던 초기 김일성 정부의 각료가 되어 마르크스주의 사회 이론을 받아들이고 사회 참여적 신앙을 실천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은 바벨론 강변의 버드나무에 수금을 매달고 예루살렘(시온)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던 나라의 소중함과 예배 시간에 마음껏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 느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나라와 예배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이었는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에 조국의 분단은 그들의 존재 가치와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념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이상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과 반대되는 공동체로 분단을 경험한 상처는 실제로 장기화되었습니다. 분단은 가족과 지역 사회뿐만 아니라, 훗날 서로 대립하는 경쟁적 구조 속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를 치명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전쟁 후,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한인 디아스포라 역시 이산가족의 비극과 소외를 경험했습니다. 재일 한인 사회는 친북과 친남으로 이념적 분열을 겪으며, 이산의 아픔과 한의 역사적 눈물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초기 이민자 중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는 농업 이민자로 멕시코 유카탄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국인이 유카탄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그들의 상황은 마치 농장 노예로 팔려 간 것과 비슷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현실은 참혹했고, 그들이 동원된 사탕수수 농장은 당시 거대한 산업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탕수수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방황하는 또 다른 그룹이 생겨났고, 그들은 쿠바로 이주하여 정착했습니다. 유카탄에서 살아남아 대를 이어온 한인 멕시코인들은 이미 5세대 이상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빈곤과 고립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또한 미국 중심의 외교 정책 속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는 한동안 그 존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당시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노예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고된 노동과 학대는 그들의 일상이었고, 초기 계약이 4년이었음에도, 마치 강제수용소에 갇힌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무기를 든 보초병들이 말을 타고 강제 노동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는 증언은 그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피델 카스트로 정부가 친북 유화 정책을 펼친 탓에 쿠바 한인들의 사회적 정체성은 지난 100년 동안 남한보다 북한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또한 미국과의 복잡한 외교 문제로 인해 이곳에 거주하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이중 차별과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쿠바 한인 역사는 1921년 288명의 한국인이 쿠바 말라티 항에 도착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은 농업 이민자로, 농업 여건이 좋아진다는 소문을 듣고 멕시코 유카탄에서 이주해 디아스포라를 형성했지만, 그들의 현실은 여전히 어려웠으며, 고통스러운 정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1910년 국권피탈로 국적을 잃고 망국의 아픔을 겪게 된 한인 디아스포라는 돌아갈 나라가 없는 현실을 맞이하게 됩니다. 흩어진 디아스포라는 눈물 어린 기도 속에서 조국의 독립과 탈식민지화를 이루어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를 기대하고 지지하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벌어들인 소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며, 현실의 고통과 눈물을 이겨내겠다는 희망찬 결단으로 삶을 이어갔습니다.[2]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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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한인 디아스포라의 메시아적 희망과 해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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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웨인 패터슨, 미국의 한국 개척지: 하와이로의 이민 1896-1910, 하와이, 하와이 대학교 출판부, 1988,19-39
[2] 인터뷰 영상에서 소개합니다: 루이스 에스파르티(멕시코 유카탄), 프란시스카 레예스 킹(쿠바 모아, 홀긴), 에드워드 케가이 주교(러시아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