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동물처럼 두터운 털가죽을 입고 있지 않을까요? 지난 겨울의 그렇게 혹독한 추위에 우리 몸에 두터운 털(fur)만 있었더라도 우리는 정말 든든하게 겨울을 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진화론을 숭상하지 않지만, 본래 인간도 동물처럼 아주 훌륭한 털가죽(fur)을 입고 창조함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져버리고 벌~건 피부만 남은 것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냐구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인간이 '타락' 이후 벌거숭이가 되는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벌거벗은줄 알게 되었더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몸(존재) 모든 것이 드러나는 '벌거숭이'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벌거벗음을 알고 난 후 '부끄러움'도 아는 존재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인위적으로 무화과 잎사귀를 잘라 자기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보려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 얼마나 스스로를 가리며 살고 있습니까? 옷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지요? 옷하나 근사하게 입으면 속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겉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합니다. 옷이 날개라고 화려한 옷을 입으면서 우리 스스로가 아주 근사한 존재가 된양 착각을 합니다. 신분, 지위, 세상의 자랑거리 등도 그런 겉옷이지요. 그 것으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세워보려 합니다. 그러면서 벌거벗은 속 '부끄러움'은 잊고 사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 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를 입히셨지요. 그 이후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 내면의 부끄러운 굳은 살을 펴 아름다운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해주시려 애쓰셨지요. 그런데 목이 곧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며 계속 벌거벗은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시려 결국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죄성으로 얼룩진 우리의 추악한 몰골을 완전히 청소하시고 부끄러운 우리 존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도록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신지 아십니까? 벗으셨습니다. 발가 벗기신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어 온갖 아픔은 물론 부끄러움까지 감당하셨습니다. 그가 그 부끄러움을 다 당하심으로 우리의 몰골을 다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 죄값을 청산하신 것이지요.
십자가에서 상처 입은 그의 손과 발은 세상의 온갖 추위와 폭력에 떨고 있는 벌거벗은 우리를 감싸 안아주십니다. 사랑과 희생의 그 따뜻한 온기로 상처 입은 우리를 '터치'해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피는 우리 상처 안으로 깊숙히 흘러 들어와 모든 아픔마저 씻어내 버립니다. 바로 이 사랑의 터치! 이는 벌거벗은 우리를 따스한 성령으로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언어 네 번째가 바로 이 '터치'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마음 가득 담은 두 손으로 서로를 보듬고 끌어 안아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며 부끄러운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됩시다. 세상에 '희망 터치'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 봅시다. 고난주일, 우리 모두 주님의 '터치'를 경험합시다! 아멘!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