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Nomadland)에서 감리교 목사로 살기

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 

(편집자 주: 이 기고문은 연합감리교뉴스의 파일럿 시리즈인 <영화와 설교> 시리즈의 두 번째로, 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4개 부분을 수상한 미국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를 통해 감리교 목사의 삶을 반추한 김선중 목사의 글이다.)

서해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신 저의 아버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입니다. “썰물 때면 친구들과 갯벌에 이것저것 들고 나가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신나게 놀곤 했지만, 밀물이 되면 그 모든 것은 갯벌에 두고 몸만 빨리 빠져나와야 했다. 그것을 ‘물거리 인생’이라고 하는데, 때가 되면 결국 모든 것을, 신나게 놀던 그 마음조차 다 남겨두고 떠나게 되는 거지.”

이번 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4개 부분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네바다주의 엠파이어에 위치한 석고회사의 인사과에서 일하던 주인공 펀(Fern)은 공장에서 광부로 일하던 남편이 죽고, 회사마저 문을 닫자 자신이 타던 밴을 개조해 노매드(방랑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펀은 미국 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한시적으로 문을 여는 물류창고를 포함해 농장, 국립공원 등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가며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이어갑니다. 상실감을 포함한 복잡한 심경의 펀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신과 비슷한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자연이 주는 느낌은 펀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회를 줍니다.

다양한 일을 하며 계속해서 길 위를 떠돌던 펀은 노매드들을 돕는 베이스캠프가 있는 아리조나의 쿼츠사이트에 가서 지도자인 밥 웰스와 개인적인 아픔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자신이 살던 엠파이어로 돌아가 창고에 보관했던 모든 물건을 관리인에게 넘겨주고, 남편이 일했던 공장과 살던 집을 한번 돌아본 후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주로 2008년 버블 경제 붕괴 이후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을 표현한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와 조셉 스튜어트-시킹(Joseph Stewart-Sicking)이 오래전에 함께 편집한 “노매드에서 순례자로”(From Nomads to Pilgrims)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그 책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노매드, 즉 개인주의적이며 목적도 없고, 소비 지향적이며 파편화된, 망각증에 걸린 영적인 관광객(tourists)으로 진단하고, 그들을 “순례하는 회중 (pilgrimage congregations)"으로 변화시키는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펀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가 방랑의 갈로 돌아가는 노매드랜드(Nomadland) 영화의 한 장면.펀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가 방랑의 갈로 돌아가는 노매드랜드(Nomadland) 영화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제게 우리의 짧은 “물거리 인생”조차 방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숙명을 그린 영화로 다가옵니다.

특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꼴을 얻으리라.”(요 10:9)라는 예수님의 “꼴”과 “목초” 그리고 “목초지(νομή)”라는 단어는 “노매드(nomad)”라는 단어와 어원적으로 관련되고, 제가 사는 연합감리교 목사로서의 삶은 “꼴”을 찾아 먹이려고 떠도는 “노매드”의 삶과 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의 정체성과 선교 기능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순회제도(itinerancy)입니다. 연합감리교회의 장정(Book of Discipline, 2016 edition)은 이 순회제도에 대해 “연합감리교회가 받아들인 방법으로써 안수받은 장로들과 준회원 장로들과 협동회원들이 봉사할 임지에 감독으로부터 파송 받아 가는 제도를 뜻한다. 모든 안수받은 장로들과 준회원 장로들과 협동회원들은 파송을 수락하고 이에 순종하여야 한다.”(¶338) 라고 말합니다.

교구 경계(parish boundaries)를 뛰어넘어 “나는 세계를 내 교구로 바라본다.”라고 말한 존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교하는 범위(scope)를 결정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감리교가 시작된 시점부터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도록 만드는 설교”(Thomas E. Frank)를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하는 것은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핵심 제도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는 “순회장로목사들의 모임(body of traveling elders)”이 서로 연대를 통한 연회를 이루는 교단을 태동시켰고, 의회(conferences) 제도와 감독(episcopacy) 제도의 두 축을 이루어냈으니, 순회제도는 연합감리교회를 이루는 뼈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노매드랜드는 몇 가지 주제를 통해 연합감리교 정회원 목사인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정체성입니다.

아마존 물류작업장에서 일할 때, 한 여성이 펀에게 자신의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노랫말을 소개합니다. “집은 그냥 단어인가 아니면 네 안에 품고 다니는 그런 것인가?”

또 한번은 어느 날 스포츠 매장에서 마주친 한 소녀가 펀에게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홈리스라면서요?”라고 물었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홈리스가 아니란다. 단지 하우스리스(houseless)일 뿐이지.” 이는 집이 하드웨어라면 홈은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는 뜻일 터입니다.    

캠프 그라운드에서 밤에 별을 보는 그룹과 함께할 때, 그 그룹의 인도자는 별들이 우주로 뿜어낸 플라즈마와 원자가 때로는 지구에 도착하여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우리의 일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며, “이제 그것들은 네 손안에 있어.”라고 읊조립니다. 아마도 이 땅의 것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거나 자기충족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완전한 것도 아니며, 그 근원이 되는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닌 더 높은 곳에 있기에 그것을 품고 살라는 뜻이겠지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라는 바울이나, 성경이 증거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행동 및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면서 이 땅에서는 “장막”에 거하였다(히 11:8-10)고 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 모두, 집이 아닌 영원한 본향이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입니다.

고장이 난 밴의 수리비 때문에 펀은 여동생을 찾아갑니다. 여동생은 펀이 결혼 후 바로 떠나 “마음에 큰 구멍이 생겼다.”라고 말하며, 펀이 언제나 밖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던 것에 서운함을 토로하면서도 자신과 함께 살기를 권합니다.

한편, 펀을 은근히 좋아하던 데이브는 아들의 권유로 아들 집으로 가서 정착하게 되고, 어느 날 펀이 데이브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니, 그의 차는 집 뜰의 잡풀 속에 주차된 채 버려져 있고, 이미 길 위를 달리던 그 차의 타이어 하나는 납작해져 있었습니다.

데이브는 펀에게 곁에 있고 싶다는 애절한 눈빛으로 함께 살자고 간청합니다. 그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데이브가 펀과 함께 춤을 추었던 노래의 가사가 이 장면에 겹쳐집니다. “우리는 서로 꼭 껴안고 다시 사랑에 빠질 거예요… 맹세컨대 당신에게 결코 상처 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펀은 정착하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나고, 서부 해안가의 벼랑을 거닐다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강풍에 높이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처럼, 상처에는 취약하나 자유로운 영혼의 모습으로 펀은 서 있습니다.

“이 영화를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바친다.”라는 영화 마지막 말이 새로운 무게로 다가옵니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여주인공 펀(Fern) 역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맨드(Frances McDormand).영화 노매드랜드의 여주인공 펀(Fern) 역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맨드(Frances McDormand).

리차드 하이젠라터(Richard P. Heitzenrater)에 따르면, 존 웨슬리는 결혼한 순회설교자들은 설교 후 바로 집으로 가지 말고 작은 신앙 그룹인 소사이어티(society)를 먼저 들릴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또한 미혼 순회설교자들의 숫자가 부족해지지 않는 한 결혼한 순회설교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정은 이렇게 말합니다: “연회는 교역자 회원들이 순회사역의 임무를 능력있게 또 능률 있게 수행하지 못할 때 그들을 해임시킬 수 있다.”(¶604.4)

러셀 리취 (Russell E. Richey)는 오늘의 연합감리교회를 이렇게 안타까운 말로 진단합니다. “우리의 선교와 목회는 관료화되었고, 우리의 정체(polity)는 지나친 구조화로 인해 질식할 지경이 되었으며, 순회목회제도는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로 변질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규율(discipline)은 단지 규정(regulation)을 지키거나 과도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현재 우리의 선교는 크리스텐돔과 크리스천 아메리카의 개념과 혼동되어 그 숫자를 늘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현실은 우리가 순례길에 있어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정착 또는 정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토마스 프랭크(Thomas E. Frank)는 연합감리교회가 회중(congregation)을 “선교의 연대적인 전초기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회중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고 독립적인 실제가 될 수 없으며, 그 어느 것이든 고정되어 절대화되면 온갖 이해관계가 생기고 그 자리에 영원한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니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교단의 정신인 연대주의(Connectionalism)를 무시한 채 개교회 이기주의에 빠진다거나, 사례비가 많은 교회를 찾아 눌러앉기를 원하고, 교인들에게는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는 설교를 하면서 정작 자신은 세습을 통해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목사의 모습도 분명 궁극적으로 정착하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세 번째는 실천입니다.

정착의 권유를 뒤로하고 떠난 펀은 애리조나의 쿼츠사이트에서 밥 웰스와 아픔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합니다.

펀의 여동생의 말처럼, 그녀는 남편을 만난 지 몇 달 만에 결혼하여 집을 떠날 정도로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부모 없이 자란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는 없었지만, 엠파이어 도시와 그곳의 사람들은 남편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랑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 도시에 일 년 넘게 살면서, 남편과 함께했던 세월을 기억하며 살았던 것이겠지요. 삶을 단지 기억하는 데만 몰두하는 펀의 아픈 고백에 밥 웰스도 마음에 담아두었던 아픔을 꺼냅니다.

그의 아들이 5년 전 자살했고, 오늘이 그의 33번째 생일이라고 말입니다. 그 아픔 속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는 자신이 사람들을 돕고 섬김으로 아들을 기릴 수(honor) 있다는 것이고, 바로 그 깨달음이 자신이 힘든 나날을 헤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유를 주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방랑자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마지막 작별 인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자신은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펀도 남편과 다시 만날 거라 확신한다고 펀을 위로합니다.

영화 중간에 서점에서 어떤 이가 피아노를 치던 장면의 노랫말이 겹쳐집니다. “떠나야만 했던 친구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친구들… 내가 고통 중에도 웃을 수 있도록, 미소지으며 눈물을 떨쳐내도록 도와줘요.”

이들의 대화는 기억과 그 기억의 갱신에 대한 것입니다.

아프고 안쓰러운 과거에 묶어놓은 사랑의 기억으로부터 상처 입은 치유자로 그 사랑을 승화시켜 아픈 이를 돕는 새로운 삶을 감당하게 하는 추진력으로서 기억이 갱신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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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캠프 그라운드에서 어떤 할머니는 펀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반지는 써클이야. 그 써클은 절대 끝나지 않아. 결국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의 사랑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네가 그 반지를 빼버리려 해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거지.”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기억을 갱신하기 위해 펀은 엠파이어로 다시 돌아가 창고에 보관했던 모든 물건을 관리인에게 주고, 폐허가 된 공장으로 가 텅 빈 건물속에 먼지 묻은 책상과 그 위에 놓인 헬멧을 바라보며 눈물을 짓습니다. 그러고는 역시 텅 비어 휑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와 먼 산까지 이어지는 텅 빈 들판도 거닐어봅니다.

이렇게 그녀는 기억을 갱신하는 아픈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새로운 노매드의 길을 떠나며 영화는 마칩니다.

송구영신 예배에서 행하는 언약갱신(covenant renewal)에는 존 웨슬리가 만든 언약예배문을 포함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언약을 우리가 다시 행하는 것인데, 그 기도문의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 저의 가치(worthiness)를 내려놓고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요 저의 의로움이심을 서약하나이다. 저의 지혜를 내려놓고 당신만을 저의 안내자로 모시나이다. 저의 뜻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만을 저의 법규로 삼나이다… 당신의 은혜로서 제가 확언하는바, 삶도 죽음도 저를 당신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나이다… 당신의 짐을 지기 위해 당신의 멍에 아래 제 생명을 내어놓나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의식을 정기적으로 갱신함을 통해 받은 사명을 “능력 있고 능률 있게”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당시 순회설교자들의 평균수명이 30대에 불과했던 시절에, 길 위에서 사명과 아픔 그리고 돌봄으로 서로 맺어져 연대하며 사명을 감당하다 다시 한자리에 모였을 때 느꼈을 감격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러셀 리취는 연회를 시작할 때마다 불렸던 특별한 찬송 “생전에 우리가(And Are We Yet Alive)”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찬송은 원래 찰스 웨슬리가 1749년에 지어 영국의 감리교 연회 때마다 개회 찬송으로 불렸는데, 미국감리교회에서는 1844년 남북전쟁 즈음에 불리기 시작하여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고 합니다. “연회에서 그 찬송은 젖은 목소리와 눈물 어린 눈으로 시간을 뛰어넘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밀물이 들어오는군요.

노매드로서 시한부 생명이었던 스웽키는 그녀가 이전에 가보았던 감명 깊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 카약을 타고 싶었던 꿈을 이루고 생을 마감합니다.

캠프 그라운드에 모인 노매드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 사람씩 나와 돌 하나씩을 불에 던지며, 나지막이 그녀에 대해 말하며 소박한 추도회를 갖습니다. “그녀는 돌을 좋아했지.” “나중에 봐요, 스웽키.”

리차드 하이젠라터가 묘사하는 존 웨슬리의 장례 모습이 생각납니다.

웨슬리는 1791년 3월 1일에 세상을 떠나자 수많은 군중이 모여 지도자들에게 (아마도 거창한) 하관식을 준비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3월 9일 새벽 5시, 오직 20명가량의 가까운 친구들만이 모여 시티로드의 새 예배당 뒤편 땅에 웨슬리를 매장합니다.  

이는 “6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각 1파운드씩을 주어 자신의 관을 운구하게 하고, 오직 자신을 사랑했고, 아브라함의 품에 이르도록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의 눈물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장례식을  화려하지 않게 간단히 해달라.”라는 웨슬리의 유언을 따른 것입니다.

공식적인 장례식은 그날 아침 10시에 예배당에서 거행되었고, 그 예배당 안에 걸쳐졌던 검은색 휘장(drapings)은 장례식이 끝난 후 여러 벌의 드레스로 만들어져 가난한 여인들에게 나뉘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펀이 길에서 위스컨신에서 온 젊은이에게 고향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편지 쓸 때 사용하라고 알려준 자신의 결혼 서약 때 썼던 시의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이 시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을 인용한 것입니다.

지상의 여름은, 그 시간은 너무 짧고, 지상의 아름다움은 결국 시들 터이지만,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색이 바래지 않고, 그대가 지금 가진 아름다움도 잃지 않을 것이라.

비록 썰물이라는 한순간 밖에 주어지지 않는 우리의 “물거리 인생”이지만, 안주하는 대신 길 위로 나서서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고 세계를 교구 삼아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함께 연대하며 살아간다면,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9-10)가 될 터입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109)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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