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처럼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인간의 전 생애는 여행과 비교할 수 있다.
여행은 항상 어떤 방향(direction) 혹은 목적지(destination)를 향해 출발하는 "떠남"을 전제로 하며, 단거리든 장거리든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일단 집을 나서야 한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본향 집을 떠나 여행길에 나선 것과 같고, “인생여행”이 끝나는 그 날은 곧 본향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된다.
인생여행의 종국이 본향으로의 귀향이라면, 사랑하는 식구나 친구를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은 슬프고 가슴 아프겠지만, 정작 본향을 향한 본인에게는 어떤 떨림과 설렘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해보라! 우리에게 꿈에 그리던 고향을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누군들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생여행을 마치고 영원히 살게 된 본향에서 누리게 될 영광, 그 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슴 뛰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우연이나 운명을 믿는 대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믿으며,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따라 평생을 사는 “사명여행”의 삶을 살아간다.
이 사명여행은 언제나 믿음을 요청한다.
하나님의 명을 받아 갈 바를 알지 못함에도 믿음으로 순종하고 떠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애굽을 떠나 40년간 광야에서의 여정을 행했던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주신 사명을 행하기 위해서는 정말 믿음 없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인생이라는 이 여행은 즐거운 것이기도 하지만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생전 처음 가보는 곳이라 더 어려운지도 모른다. 믿음으로 내딛는 길이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인생여행, 그것은 바로 "믿음여행"인 것이다.
지금 이순간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동안 진행해 온 “인생여행”과 “사명여행’ 그리고 “믿음여행”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매 순간, 모든 고비마다 받아 누린 하나님의 은혜!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더 크고, 더 강하며, 더 풍성히 경험되는 우리 인생여행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여행”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The grace of our Lord was poured out on me abundantly, along with the faith and love that are in Christ Jesus.” NIV). 이 한 구절 속에는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이 많이 들어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바울 사상의 총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에게 믿음과 사랑을 가져다주었다.
믿음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며(로마서 3:23 이하; 에베소서 2:8), 사랑 안에서 일하고(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작동한다. 즉, 믿음과 사랑은 어떤 인간적인 기질이 아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예 생성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은혜(grace)”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은혜는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gift)”로, 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언급하는 “긍휼(자비, mercy)”과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자비가 탕자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라면, 은혜는 탕자에게 온갖 선물과 함께 잔치까지 베푸는 것이며, 자비가 지옥의 문을 닫는 것이라면, 은혜는 천국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비는 그렇게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게 만들었고, 은혜는 바울을 사도로 세우게 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 가지 속성을 갖는다.
첫째는 “지속성(ceaselessness)”으로, 단 한 번 주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더하여진다. 둘째는 “의외성(unexpectedness)”으로, 전혀 뜻밖의 상황에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주어진다. 셋째는 “충만성(fullness)”으로, 조금의 모자람 없이 우리의 삶을 듬뿍 채운다. 바울의 고백처럼 은혜는 폭우같이 우리에게 “쏟아 부어진다(pouring out).”
바울은 이 은혜에 힘입어 철저히 “은혜주의자(gracist)”로 살았다. 원래 골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인종차별주의자(racist)”였음이 분명하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은혜주의자로 변화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체험적인 개념이었고, 바울의 삶을 지탱케 한 원동력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를 뜻하는 단어 “racist” 앞에 하나님을 뜻하는 “God”의 “G”를 붙이면, “은혜주의자”를 뜻하는 단어, “gracist”가 된다. 따라서 “인종차별주의(racism)”라는 부정적인 개념 앞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다면, 인종차별 문제는 해결 가능한 문제가 된다.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품으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 다른 사람은 무조건 품고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다시 바울로 돌아가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함으로 평생 은혜주의자로 살면서, 입만 열면 은혜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은혜에 살고, 은혜로 죽은 사람이었던 그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
서두에 언급한 대로, 모든 여행은 그 끝이 있다. 굳이 이별, 작별, 고별을 말하지 않아도 여행은 이미 그 마지막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이 짧은 “인생여행”은 본향으로 돌아가면서 끝을 맺을 것이고, 동시에 우리의 “사명여행”과 “믿음여행”도 마무리 짓게 되겠지만, 죽음 후에도 끝나지 않은 여행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본향에서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이라 믿는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여행”이다.
천국에 이르렀을 때, 사랑의 주님께로부터 “. . .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태복음 25:23)”라는 말씀과 같은 칭찬과 더불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면류관의 상급을 받는다면, 그 얼마나 가슴 벅차고 기쁠까?
바로 그 순간, 아마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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