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초입에서 작은 슈퍼를 하며 약초를 캐는 젊은 내외가 있습니다. 그들의 슈퍼는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활짝 오픈 된 사랑방과 같았습니다. 사람 좋아하는 내외는 그 곳을 찾는 이들에게 힘들게 따온 귀한 약초를 돈도 받지 않고 나누기를 즐겨했습니다. 어느 날, 남자가 고가의 말굽버섯을 따왔는데 그것 역시 지인들과 주저함 없이 나누는 것을 보고, 그들을 취재하던 <사람과 사람들=""> 다큐 작가가 물었습니다. “그 귀하고 값진 것들을 그냥 나누어 주면 아깝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내외가 한 목소리로 “다 퍼주고 나니 사람이 남더군요”라고 하는 말을 듣는데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바알신의 본거지인 시돈의 사르밧에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있던 한 과부였습니다. 상상컨대,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신앙을 밝혔다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 수모, 살해의 위협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뭄이 심해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지만, 그녀는 이웃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먹을 것을 위해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가 그녀를 만나던 날,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날을 기다리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하고 빵 구울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날 엘리야를 통해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왕상17:11). 엘리야는 인간적으로 정말 하기 어려운 이 요청을 하나님의 말씀에 압도되어 담대히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이 바알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엘리야의 요청대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마지막 양식을 아낌없이 퍼 주었습니다. 그녀의 손에 이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사람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는 엘리야 선지자가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큰 보상인지 보십시오. 엘리야를 통해 당장 먹을거리가 해결 되었으니 그것이 축복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값진 축복은 그녀는 엘리야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앙적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죽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이야 사는 게 어렵지!”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삶이 구질구질하고 미래의 소망이 없을 때, 사람들은 ‘더 살아서 뭐하나’하는 탄식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좀 더 깊어지면, 실제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죽는 것, 눈 한번 꾹 감으면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에는 눈 한번 꾹 감아서 안 되는 일이 도처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여인은 그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해먹고 더 이상 해 먹을 양식이 없어서 죽게 되면 죽으리라는 그녀의 고백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삶에 순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순수하게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고수한 그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서 위로하셨습니다. 그녀에게 가루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은 것이나 기름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큰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복은 하나님이 그녀를 생각하셔서 엘리야는 보내셨다는 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깊은 고난 중에 놓이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기억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글쓴이: 이철구 목사, 남부플로리다한인연합감리교회, FL
올린날: 2016년 8월 16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