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글은 2023년 특별한인총회 이튿날인 10월 3일 저녁 예배에서 조은철 목사가 전한 설교문이다. 조 목사는 북일리노이 연회에서 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를 섬겼고, 한인연합감리교회 전국연합회 8대 회장을 역임했다.)
왜 연합감리교회에 남게 되었느냐는 주제로 얘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왜 남았는지를 밝히려면 제가 어떤 연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에 서 있는지, 그 위치를 조명해야 했으니까요.
제가 54학번인데, 제가 공부할 때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부르짖은 명제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실존(vor Gott)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은 언제냐 하면 바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그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문제를 조명하면서, 조은철, 제가 서야 할 지점이 어디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순간에 십자가가 생각났습니다.
십자가의 수직선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나타내고, 수평선은 내가 연합감리교회에 들어와서 목회하는 동안 교단 리더십과 맺은 관계성일 겁니다. 그래서 수평선과 수직선이 마주치는 인터섹션, 즉 교차점이 바로 내 실존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저의 수직선을 조명할 때, 하나님과 저의 관계 형성은 거의 태생적 관계였습니다.
일찍이 한국에 들어온 북감리교 선교사 가운데 로버트 샤프(Robert Sharp) 목사님과 앨리스 샤프(Alice Sharp) 사모님 내외분이 있는데, 이분들은 공주에 주재하면서 논산, 강경, 부여, 홍성 등지를 오가며 전도에 힘썼습니다.
이들의 전도로 저의 모친은 논산 제일감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이 논산에서 선교하던 때는 1930년대 초였습니다.
그 당시 초대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가진 재능을 기부하는 봉사 활동으로 전도했는데, 앨리스 사모님은 산파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모친이 저를 출산할 당시 오셔서 도왔는데 저를 받아 목욕을 시켜놓은 후, 은철(恩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저희 마을에 홍역이 창궐해서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제 부모님도 첫째를 포함해서 세 아이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무쇠처럼 튼튼하게 자라라고 이름을 은철로 지어준 것입니다.
수직적 관계 형성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저의 모친은 제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10대 초반 세상을 떠난 모친을 그리워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의과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된 후, 모친을 앗아간 뇌졸중 환자들을 다소라도 돕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날, 저의 부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어머니가 아들 3명 중 하나는 하나님께 바치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해도 네가 가장 적당한 것 같다. 그러니 네 어머니의 소원을 네가 들어줘야겠다.”
부친의 말을 들은 저는 의대 진학을 포기하고, 감리교 신학교에 54학번으로 진학했습니다.
어느 날 홍현설 박사님께 이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홍 박사님은, “조 군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소천을 통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으로 소명을 받았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직적 두 사건은 태생적 관계로 저를 규정했으니, 저는 도저히 감리교회를, 아니 지금의 연합감리교회를 떠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제 수평선으로 넘어와 저와 연합감리교회 감독님들과의 관계 형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렛신학교(Garrett Theological Seminary)가 복음신학교(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와 통합되어 개렛복음신학교(Garrett-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가 되기 전인 1972년 ETS에 입학하여 목회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당시 시카고 지역의 폴 워시본(Paul Washburn) 감독을 찾아가 면담을 했습니다.
제가 감독님을 만나서,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이 계획을 승인해 주고, 지원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의 정회원인 저를 북일리노이 연회의 정회원으로 허입시켜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워시본 감독님은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독으로서 교회 개척을 반대할 수는 없으니 OK, 승인하겠다. 그러나 예산은 없다. 1년 동안 봉사로 수고할 수 있겠느냐? 그 대신 네가 원하는 지역의 어느 교회당이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겠다. 그리고 네 아내의 직장은 내가 구해주겠다. 1년 후, 결과에 따라 정회원으로 허입할지 여부를 고려하겠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워시본 감독님은 매달 나의 사역을 위해 지방감리사의 판공비에서 1,500달러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런 합리적, 포용적, 타협적, 긍정적 연합감리교회에 내가 속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7년간 한인 이민자들을 위한 공항 목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항 목회 시대를 접고, 미국인 주류 사회에 들어가 미국인을 섬기는 목회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 교회로 파송을 요청하고, 펜더치(Pen-Dutch)라고 불리는 보수적이고 부지런한 농부들이 사는 마을 시더빌(Cedarville)에 파송을 받아 갔습니다. 저와 아내는 이 사역을 만족하며 섬기고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당시 고교생이던 저의 큰딸이 제가 섬기던 마을에서 고등학교가 있는 프리포트(Freeport)까지 학교 버스로 통학하는데, 제 딸이 버스에 오르면 미국 아이들이 자꾸 “정칭”이라고 놀린다는 겁니다. 저는 “정칭(Jiang Qing)”은 모택동의 아내 강청으로 좋은 뜻이라고 아이를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프리포트에 있는 맥도날드나 피자헛 같은 식당에 가서 식사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이 창가에 매달려 안에 있는 “정칭”을 구경하느라고 야단이었을 정도입니다. 아이는 위축되었고, 갈수록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3년 후 저는 감독님에게 파송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당시는 은퇴하셨던 워시본 감독님은 파송 변경을 요청한 저의 사유를 듣고 후임 감독인 제시 드윗 (Jesse R. DeWitt) 감독님에게 부탁해 제가 시카고 지역으로 파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필요에 귀 기울여주고, 인정하고, 염려해 주고, 도와주는 연합감리교회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드윗 감독님 지휘하에 한국 선교팀을 만들어 한국에 가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드윗 감독님은 한국 미션 투어 내용을 저에게 맡겼는데 몇 가지는 반드시 실현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북감리교회 선교의 산실인 정동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정, 가택 연금 중에 있는 김대중 씨 집 방문하기, 그리고 산업선교 현장 견학, 휴전선 방문 일정 등을 준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50명으로 구성된 선교팀이 일주일 예정으로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선교팀 방문 일정에 꼭 넣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 교회의 수요예배였습니다. 저는 김선도 감독님이 담임하고 있던 광림교회에서 드윗 감독이 설교할 수 있도록 했고, 저는 감독님 설교를 통역했습니다.
예배 후 김선도 감독님이 드윗 감독님을 사무실로 초청해 티타임을 가졌습니다. 그때 김 감독님이 흰 봉투를 꺼내 드윗 감독님께 주자 감독님이 딱 거절하셨습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하다가, 드윗 감독님이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그럼, 이 교회에 있는 지체장애인을 위한 헌금으로 사용해달라.”
김 감독님이 저에게도 통역했다고 봉투를 건네줍니다. 설교자가 거절하고 기증했는데 통역자인 제가 어떻게 감히 받습니까? 그래서 저도 똑같이 헌금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일행과 함께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저는 피곤한 상태라서 좀 쉬려고 맨 뒤 좌석으로 가서 눈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불 꺼진 버스 안에서 드윗 감독님이 더듬더듬 제가 앉아 있는 뒷좌석까지 찾아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하시는 겁니다.
“너는 사례비를 받지 왜 안 받았느냐? 통역인 너는 일을 한 것인데 나 때문에 네가 안 받은 것 같아 미안하다.”
이런 열린 태도와 정직한 마음을 가진 지도자들이 있는 연합감리교회에 속한 것을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기피 인물인 김창준 목사님에 매력을 느끼고 깊이 연구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분에 대한 논문을 쓰는 중입니다. 제가 이분에게 심취한 것은 뭐였냐, 그분은 애국자였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계 감리교 대표로 참여해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셨죠. 그런데 그분은 나라를 사랑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감리교회를 떠나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은 자신의 진보적인 사상을 위해, 신학적 사상을 위해 교단을 분열시키지 않았습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리교회를 통해서 경험했고, 수평적으로는 교단의 리더들과 저의 관계를 통해서 연합감리교회의 열린 마음, 정직하고, 돌봄이 있는 지도자들을 통해서 사랑을 배웠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어찌 이런 연합감리교회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여기 우리, 치유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이 자리가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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