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스트웨이연합감리교회(ChristWay UMC)>는 위스컨스주 밀워키에 소재한 몽족 교회다.
그들의 친교가 끝나갈 무렵인 지난 6월 2일 오후 2시 경, 한 콩고인 가정이 5명의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들어섰다. 곧이어 콩고인들이 차례차례 교회 건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배 시간은 오후 3시지만, 예배가 시작되지 훨씬 전에 콩고 교인들은 드럼의 리듬에 맞춰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며 감사와 축제의 분위기 속에 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위스컨신주 밀워키에 소재한 <뉴호프연합감리교회(New Hope United Methodist Church)>의 교인들이다.
콩고에서 온 난민들인 이들의 찬양이 감사와 축제의 즐거움으로 채워진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았다는 것이다.
전쟁과 박해를 피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야만 했던 난민들을 밀워키의 카톨릭 자선단체는 위스콘신에 그들의 피난처를 제공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뉴호프교회의 부목사이자 신학생인 데두마코노 제토는 "1996년 콩고 내전 중, 나의 아버지와 두 여동생이 살해당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콩고를 탈출하여 탄자니아의 난민촌에 도착했다. 2012년 나는 미국에 올 수 있었고, 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7개월 후 미국으로 건너와, 우리 가족은 다시 모이게 되었다. "
콩고에는 많은 위기와 내전이 있었지만, 1996년부터 1997년 사이에 발생한 1차 콩고전쟁과 1998년부터 2003년까지의 2차 콩고전쟁은 특히, 많은 희생자를 냈다. 2차 콩고전쟁은 대(大)아프리카전쟁 또는 아프리카세계대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희생자만 540만 명이나 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전쟁이다.
제토는 자신의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을 “치유와 화해의 필요성에 응답하는 것이다.”라고 밝히며, "거의 모든 교인이 비슷한 삶의 경험,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외상 후 증후군을 앓고 있다.”라고 말했다.
<크라이스트웨이연합감리교회>도 몽족 난민교회다. 이 교회의 역사는 미국의 대외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몽족들을 베트남전과 라오스 비밀전쟁에 투입했다. 1975년 5월, 미군은 라오스에서 철수했고, 공산정권인 파테 라오스가 라오스를 장악하면서 몽족 전체는 위기를 맞았다.
<크라이스트웨이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중 한 명인 초우 양 씨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군인 가족들은 미국이 마련한 특별기를 통해 태국으로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배를 타거나 걸어서 정글을 탈출했다. 나는 당시에 교사였는데, 운이 좋게도 자동차로 라오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라오스를 벗어난 후 나는 우리를 보호하며 메콩강을 가로질러 태국으로 데려갈 가이드를 고용했다. 태국에 도착한 우리는 1년 반 동안 난민 캠프에서 살다, 1976년 10월 마침내 미시간 주로 오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은퇴한 전기기술자이며, 교회 재단이사회의 이사로 봉사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요나 양 목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라오스에서 미국 비밀군대의 대령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온 후 연합감리교회 최초의 몽족 목회자가 되었으며, <크라이스트웨이연합감리교회>의 전신인 <몽크리스쳔커뮤니티감리교회>의 창립 목사이기도 하다.
그 역시는 라오스에서 탈출하는 과정에 엄청난 위험을 겪어야 했다.
정희수 감독은 양 목사의 경험을 긴장과 숨 막히는 순간의 연속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목사는 메콩강을 건너면서 라오스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친척과 친구들을 목격하면서, 낮에는 메콩강 위에 떠다니는 물풀 더미 밑에 숨었다가 밤에만 이동하여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몽족의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정착하고 직업을 갖기 위해 영어와 기술을 가르치는 공동체가 필요해졌고,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서로를 양육할 공동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1981년 3월부터 요나 양 목사와 함께 예배 공동체로 모이기 시작했다. 1984년 6월에 위스컨신연회의 선교교회가 되었고, 마침내 1987년 6월 11일에 연회의 정식 회원교회(chartered church)가 되었다.
"1999년, 밀워키의 <엠마오연합감리교회>는 교회가 노령화와 교인 감소로 인해, 몽족에게 건물 소유권을 이전해 주기로 결정했었다.”라고 추 양 씨는 회고했다.
"그 이후 교회는 지속적이고, 급속하게 교인 증가와 재정적 안정을 이루며 성장했다."
한때 그들은 부족한 재정을 걱정했지만, 지금은 주일학교 교실과 주차 공간이 충분하지 못한 것을 해결하려 노력한다.
2009년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교회의 이름을 <크라이스트웨이연합감리교회>로 변경하고, 현재는 교인 450명의 미국 최대 몽족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두 명의 목사를 배출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여성인 체 하우 목사는 몽족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이고, 수커 양 목사는 현재 위스컨신연회 중북부지방 감리사로 섬기고 있다.
오늘날 <크라이스트웨이연합감리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의 감리교회는 <몽연합감리교회 찬송가>를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 이 찬송가는 <크라이스트웨이연합감리교회>의 전신인 <몽크리스쳔커뮤니티연합감리교회>의 교인들이 번역하거나, 작곡하고 작사한 찬송들로 2003년에 출판되었다. 이 찬송가는 미국과 전 세계의 몽족 연합감리교회 예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예배 자료다.
2014년 10월 29일 모잠비크 출신의 자녀들이 6명이나 되는 콩고인 가족이 후원자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자신이 그들을 위한 후원자가 되기로 자원한 스티브 시옹 씨는 밀워키난민정착기구의 디렉터이다.
"왜 몽족 난민만 후원해야 하는가? 콩고 난민은 후원하면 안 되는가?”라고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나도 수십 년 전에 미국인 가정의 후원을 받았으며, 선교는 해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그는 말했다.
후에 그는 자신이 후원하는 콩고인 가족에게 <크라이스트웨이교회>를 소개했고, 그들이 교회에 오기 시작하면서, 다른 난민들도 하나둘씩 그들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콩고 교인의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고 했다. 당시 예배는 몽족 언어와 영어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콩고 출신의 일부 사람들이 밀워키의 카톨릭 교회에 다녔고, 다른 사람들은 <크라이스트웨이교회>를 비롯한 다른 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용어인 스와힐리어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몽족어과 영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라고 시옹 씨는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언어로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더욱 위대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 임원회에 콩고사역팀을 만들고 그들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2017년 1월 <크라이스트웨이교회>는 자신들의 교회를 콩고 예배 공동체에 제공하고, 교회 시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결의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당시 감리사였던 톰슨 목사를 만났다. 연회에서도 이 사역을 지원하기로 하고 콩고 사역을 시작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이제 이 교회는 당신들의 교회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너무나 기뻐했고,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감사했다.”라고 시옹 씨는 회고했다.
콩고 회중은 2017년 2월 28일부터 위스컨신연회의 선교 교회가 되었고, 자신들의 교회 이름을 <뉴호프연합감리교회(New Hope United Methodist Church)>라고 지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콩고 난민들에게 스와힐리어, 프랑스어, 키벰베 그리고 링갈라어를 포함한 자신들의 언어로 드리는 예배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또한 난민들인 그들에게 영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예배를 통해 육신과 정신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소망을 안겨준다. 난민들인 우리들은 서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서로 돕는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다."
연합감리교회 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615-742-5470 or [email protected]로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