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새롭게 하는 능력(Suffering, Renewing Power of God)

(편집자 주: 이 글은 김영봉 목사가 2023년 특별한인총회 셋째 날인 10월 4일 저녁 예배에서 전한 설교문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3-5절

1.

저는 버지니아주 워싱턴DC 가까운 곳, 센터빌이라는 곳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영봉 목사입니다. 시카고 제일연합감리교회 100주년을 축하하고 2023년 특별한인총회를 마무리하는 이 소중한 예배에 말씀을 전하는 영광에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의 무게를 잘 알기에 이 자리에 서는 것이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은혜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니, 그분을 믿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먼저, 시카고 제일연합감리교회의 10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100년이라!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민 교회 역사 100년은 그 의미가 특별합니다. 이민자들의 근본적 정체성인 부초와 같은 삶의 특성 때문입니다. 1,000명도 넘게 모이던 교회가 한두 주일 만에 10명 남짓만 남고 공중 분해될 수 있는 것이 이민 교회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이민 교회 현상을 보고 참 기이하다 싶었습니다. 그때 30년 넘게 이민 생활을 하신 장로님께서 저에게 해 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목사님, 이민자들이 왜 이렇게 쉽게 교회를 떠나는지 아십니까? 우리 이민자들은요, 가장 떠나기 어려운 조국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떠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요! 그것을 생각하면, 100년 역사를 이어왔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고, 축하받을 일이고, 기뻐할 일입니다. 이 교회에도 30년, 50년 혹은 60년을 지켜오신 교우들이 계실 것입니다. 같은 감리교인으로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도 훌륭했지만, 앞으로의 100년 역사는 더욱 빛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교단 탈퇴(Disaffiliation)의 혼란이 수습되면서 다시 모인 한인총회, 지난 사흘 내내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함께하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인데요. 하나부터 열까지 많은 분들의 마음과 정성과 수고가 느껴지는 총회였습니다. 저와 제 아내도 한인총회에 여러 번 참석했지만, 그중 최고였습니다. 한인총회라는 말 앞에 ‘특별’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모로 행정적인 것이었는데, 내용에서도 정말 특별했습니다. 이번 총회를 준비한 모든 분에게 뜨거운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2.

바울 사도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 전에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시고 그 나라를 살고 그 영원한 나라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행하신 일을 교회가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대체 불가입니다. 인간 사회에 등장한 어떤 단체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겉모습은 한없이 초라해 보일 수 있으나, 그 본질을 안다면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볼 때 겉모습이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가 끊임없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지금,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라는 말은 참 공허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을 본다면, 그 말은 여전히 진실입니다.

교회라는 몸의 지체가 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임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얻는 것처럼, 믿는 이들이 모이면 ‘주님의 몸’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교회로서의 필요조건을 충족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이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몸에 비유한다면, 몸을 이루는 각 지체는 뇌가 보내는 지시에 따라 움직여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로 모여서 부단히 훈련해야만 모든 지체가 서로 연합하여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훈련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목적에 합당하게 되려면 고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몸이라는 이름은 얻었으나 몸답게 일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의 몸이 다 같지 않지요. 갓 태어난 아기의 몸도 있고, 병든 몸도 있고, 건강한 몸도 있습니다. 어린 생명이 태어나면 처음 몇 달 동안은 누워서 손과 발을 쉴 새 없이 허우적거립니다.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기를 반복합니다. 아기는 첫 일 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자라는데, 그에 따른 에너지 소비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누운 채로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것도 대단한 에너지가 필요한 운동입니다. 어떤 레슬링 선수가 두 살 아이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해보았다고 합니다. 30분도 못 하고 지쳐버렸다고 하지요. 그렇게나 고된 훈련을 하기에 신생아는 하루에도 여러 번 잠을 자야 합니다.

왜 아기는 깨어 있는 동안 그토록 부지런히 팔다리를 움직일까요? 뇌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지체를 움직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밥을 흘리지 않고 수저로 떠먹기까지 수백 번은 흘려야 합니다. 손가락을 제대로 사용하여 글씨를 쓰는 데 4년 이상이 걸립니다. 이처럼 몸의 지체들이 뇌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상당한 훈련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척추 신경에 손상을 입은 환자는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을 통해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행하는 교회가 되려면 모든 지체가 그분의 뜻에 조율되고 순종하는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그 몸은 아직 어린 아기의 몸 혹은 코마 상태에 빠진 몸에 불과합니다. 그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3.

지금까지 2000년 기독교 역사 중 모든 지체가 완벽하게 뇌의 지시를 따라 민첩하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몸과 같은 그런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간헐적으로 나타나기는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그런 교회가 잠시 출현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언제나 모든 지체가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행한 교회는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금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 주님의 뜻에 완전히 조율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매일, 항상 주님과 일치되어 살고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자주 혹은 가끔 주님을 망각하고 삽니다.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최선의 의지를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사람조차 이런 시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수준의 신앙인이 모여 있기 때문에 완전한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 모두가 주님의 뜻을 완전하게 분별하고 완벽하게 순종하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런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지체가 된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속해서 힘쓸 따름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적 생활에 힘쓰고 정기적으로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목회자로서 혹은 교회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교회로 인해 가장 감사하고 자랑스럽고 기쁠 때는 교회의 모든 지체가 한 몸이 되어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

여기서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유익과 안전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자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바울 사도는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바울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목회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할 이유가 여럿이지만, 교우들의 믿음이 자라고 서로를 향한 사랑이 깊어져서 교회다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그중 제일입니다. 반면, 목회자가 가장 가슴 아플 때는 교우들의 믿음이 식어져서 서로를 미워하고 그로 인해 교회답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입니다. 

2023년 특별한인총회의 세째 날인 10월 4일, 김영봉 목사의 설교 후, 참석자들이 찬양을 하고 있다. 사진 설명, 왼쪽부터 이훈경 목사, 조은철 목사, 조시자 사모.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2023년 특별한인총회의 세째 날인 10월 4일, 김영봉 목사의 설교 후, 참석자들이 찬양을 하고 있다. 사진 설명, 왼쪽부터 이훈경 목사, 조은철 목사, 조시자 사모.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4.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숙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다음 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간직한 그 인내와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4절)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서 제 기능을 한 이유는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 인내하며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 학파의 공헌 중 하나는 ‘피스티스’, 즉 믿음이라는 말이 자주 Faith가 아니라 Faithfulness 혹은 Loyalty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새 관점 학파의 리더 중 하나인 니컬러스 토머스 라이트(N. T. Wright)는 그의 사역 성경 <The Kingdom New Testament>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As a result, we ourselves can tell all the churches of God how proud we are of you—of your patience and loyalty in all your troubles, and in all the sufferings you are going through.

토머스 라이트는 ‘피스티스’를 Loyalty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충성스러움”, “신실함” 혹은 “한결같음”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박해”는 믿는다는 이유로 외부로부터 받는 손해와 고난을 가리키고, “환난”은 인생사에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난을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울은 교회 내적으로 겪을 수 있는 분열과 갈등과 싸움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외부로부터의 박해와 교회 내적인 환난을 모두 겪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부닥쳐서도 그들은 한결같이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교회를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묵묵히 견뎠고, 하나님을 믿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믿음은 깊어졌고, 성도 간의 사랑도 커졌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을 기쁘게 했고, 가는 곳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4-5절).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난을 싫어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고난으로부터 면제되고 만사형통할 것이라 기대하고 믿음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심한 박해를 당할 때 미련 없이 신앙을 떠납니다. 고난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믿었는데,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겪게 되니, 가차 없이 믿음을 버리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웬만한 환난도 견디지 못합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거나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관계의 문제 혹은 생활고의 문제가 심각해지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회수합니다. 교회 안에 분열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면 견디지 못합니다. ‘이 꼴을 보자고 내가 믿었는가?’라고 생각하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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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은 믿음이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박해와 환난을 통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아닙니다. 인생사가 그렇습니다.

오래전에 준재벌급에 속하는 가정의 자녀가 찾아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나이 사십을 바라보는 청년이었습니다. 저를 만났을 때 그는 지독한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한 해도 못 견디고 계속 이직했습니다. 직장에서 어떤 문제를 당하면 그 문제를 대면하여 해결하기보다는 피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찾아왔을 때도 직장에 사표를 내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머니의 과보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언제나 어머니가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 어머니는 그 교사를 전근시키거나 자신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문제를 직접 대면하여 풀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했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어머니 없이 사회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그 청년은 자라면서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직장에서 문제만 생기면 불안에 시달리고 결국 퇴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화 끝에 청년이 저에게 한 말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제가 목사님을 찾아온 까닭은요. 나 같은 사람이 더는 생기지 말았으면 해서입니다.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시니, 저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셔서 저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인생사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믿음도 고난을 대면하고 씨름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 청년이 자신의 모습에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를 찾아와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5.

반면,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거나 인생사에서 겪을 수 있는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믿음의 줄을 더 강하게 부여잡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박해나 환난이 믿음을 버리거나 교회를 떠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생사에서 당해야 하는 고난을 다른 눈으로 봅니다.

고난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인과응보적’인 세계관으로 고난을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과 형통의 배후에는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카르마’, 즉 업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고난을 당할 때 “Why me?”라고 질문합니다. 커다란 불행을 당하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고 항의합니다. 

둘째는 고난은 무작위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의 결과라고 봅니다. 거기에는 어떤 원리도, 법칙도 없습니다. 인생사에 커다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재수에 옴 붙은 것입니다. 최선의 방책은 그런 화를 당하지 않도록 바라는 것이며, 그런 화를 입을 때는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 두 견해와 전혀 다릅니다. 성서는 이 세상이 인류의 죄로 인해 깨어져 있으며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입은 존재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와 불행은 많은 경우 무작위로 일어납니다. 의로운 사람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할 수 있고, 악한 사람이 승승장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체념적인 세계관과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인간이 당하는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습니다. 고난이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이 고난을 주기도 하시고, 때로 그분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함께하기도 하시며, 때로 그분은 우리가 당한 고난을 변모시키기도 하십니다.

박해와 환난을 당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따지면 우리의 주님은 인류 역사에 태어난 모든 사람 중 최고입니다. 그분이야말로 털끝만 한 고난도 받을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인류의 모든 죗값을 짊어지고 고난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을 고난의 길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죗값을 치르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고난 없는 낙원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신처럼 대면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고난을 품고 변모시키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막 8:34)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고난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그들도 자신처럼 무고하게, 말도 안 되는 억울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 16:33)      

이렇듯, 예수님은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믿는다고 해서 인생사에 당할 수 있는 환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고난을 더 많이 겪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박해와 환난을 극대치로 당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 더욱 진실하게 들립니다.

6.

이것이 고난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가 박해와 환난을 당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그런 주님을 믿는 사람은 박해와 환난을 당하여 “왜 저입니까?” 혹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이크! 큰일 났네!” 하면서 두려워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흠, 올 것이 왔구나! 어서 오너라!” 하면서 속으로 ‘하나님, 이 고난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 있을 때 쓴 일기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감방에 갇힌 첫날, 그분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빈방에 홀로 앉으니 고독이 밀려오네.

성삼위 함께 거하시니 모두 함께 네 식구가 되었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마조히스트의 종교가 아닙니다. 고난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피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늘의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기독교 복음의 목적을 평안하고 복되고 번영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개한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목적은 우리 개인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깨어지고 상처 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는 이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골 1:24)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믿는 이들에게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고난 없는 일상이 정도 이상으로 지속되면 “할렐루야!”를 부를 것이 아니라 뭔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고난의 왕이신 예수의 사람들은 고난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난을 기뻐하고 환대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견뎌낸 박해와 환난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예배, 성찬, 말씀, 묵상 같은 것들을 말하지만, 그중 최고는 믿음으로 겪는 고난입니다. 존 웨슬리가 ‘Means of Grace’를 말했는데, 고난을 담대히 대면하고 품어 안고 기뻐하는 것은 은총의 도구 중 최고입니다. 앞에서 본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5절)

사도는, 우리가 박해와 환난을 믿음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죽고 나서 가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데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교회의 지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스콧 펙은 이제는 고전이 된 그의 저서 <The Road Less Traveled>에서 인생의 목적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리교식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화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박해와 환난을 당할 때 흔들리지 말고 인내하며 한결같이 믿음의 길에 서 있으면 우리의 성화 과정이 accelerate 됩니다. 그러니 고난이 다가올 때 그 고난을 환영하고 인내하며 한결같은 믿음으로 고난을 겪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영적 진리와 신비를 더 보게 됩니다.

나이가 이즈음이 되고 보니, 저는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꿀리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운동 잘하는 사람에게 꿀렸습니다. 한창때는 학문과 사상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적잖이 꿀렸습니다. 이제는 그런 것으로는 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저를 꿀리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 불을 헤쳐 나온 사람을 만나면 적잖이 꿀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저보다 더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 더 많은 고난을 치른 사람, 그래서 바울 사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가 선명한 사람—그런 사람 앞에 서면 많이 꿀립니다. 저는 가닿지 못한 진리를 그 사람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저보다 더 합당하게 빚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 서면 저 자신이 가짜 같아서 꿀립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면 저는 환영할 것입니다. 저를 업그레이드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7.

이제 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먼저 시카고 제일연합감리교회 교우님들께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느라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단 탈퇴 문제로 지난 수개월 동안 겪은 지독한 몸살도 잘 이겨내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알아채지 못하셨을 테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더욱 합당한 모습으로 빚어지셨습니다. 만일 그 고생을 하고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빚어지지 못했다면 정말 안타깝고 억울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믿음 안에서 그 고난을 견디고 이기셨으니, 정금같이 빛나게, 철같이 강하게 연단되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여러분은 과거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할 만한 영적 체력을 기르신 것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가 전립선암을 치료하면서 “Don’t waste your suffering”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는데, 그것을 얻지 못하면 정말 고생만 한 것입니다. 그것을 ‘헛고생’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고생을 통해 그 유익을 얻으면 그것이 추억이 되고 간증이 되고 자랑이 되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이상현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상처가 성흔으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시카고 제일연합감리교회 교우 여러분, 지난 수개월간 여러분이 겪은 고난이 귀한 추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동안 여러분이 받은 여러 상처가 성흔으로 변모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더욱 합당하게 지어져서, 100주년 이후에는 더 아름다운 사역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한인총회로 모인 동역자 여러분, 지금 우리는 교단 상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인 교회든, 타인종 교회든, 문제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문제를 겪지 않는 목회자가 없습니다.

월요일에 공항 라이드를 해주신 후배 목사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아들뻘의 그 목사님이 겪고 있는 아픔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렸습니다. 목회가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근본적인 회의를 품을 만큼 어려움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분만 그렇겠습니까? 아무 문제 없는 듯 입 다물고 있어서 그렇지, 말해보자고 하면 그런 이야기 없는 분이 어디 있을까요? 저라고 없을까요?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은 배짱껏 목회하고 계시지요?”라고 물으십니다. 세상에 그런 교회, 그런 목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옛 속담에 “꽃 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목회는 근본적으로 아픈 겁니다. 목회는 사랑하자는 것 아닙니까? 아플 각오를 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처투성이의 목사가 상처투성이의 교인을 사랑하고 섬기자는 것이 목회 아닙니까? 고난은 목회 현장의 기본값입니다. 게다가, 교단 현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갈등과 좌절과 불안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많은 동역자가 위축되어 있고, 흔들리고 있으며, 경계선상에까지 내몰려 있습니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희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단에 희망이 없다고, 교단의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썩었다고, 그래서 희망이 없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하지만 언제 교단이 희망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언제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희망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교단과 교권 조직은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면서 생겨난 필요악입니다. 필요악은 필요한 만큼, 최소한의 정도여야 하는데, 한없이 커지다 보니, 악이 정도 이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희망을 찾으려 하니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때, 가장 앞서서 간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 뒤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예민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따라갔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이름 없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지역의 장벽, 인종의 장벽, 문화의 장벽을 넘어 땅끝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박해와 환난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편안하고 안전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뒷자리에 처진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과 제도를 지키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희망은 성령께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예민하게 분별하고 박해와 환난을 환대하며 성령의 도구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희망은 총회에도 있지 않고, 연회에도 있지 않고, 감독회에 있지도 않습니다. Frontline에서 차별과 냉대와 배척과 거부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성령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고 “오늘 하루만 버티자”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분들은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지친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분들의 표정과 눈빛에서 매일 어떤 전쟁을 하고 있는지가 느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저에게 힘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빼내 오고 싶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바로 그런 분들께 있음을 저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번 우리 모임의 주제가 “여기, 다시,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받은 부르심을 돌아봅시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먼 과거,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주의 종으로 나섰을 때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대형 교회 목사로 성공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까? 교권의 사다리를 타고 승승장구하는 것을 원했습니까? 든든한 은퇴 연금을 확보하고 중산층의 넉넉한 삶을 살기 원했습니까? 존경받고 대접받는 삶을 원했습니까?

그런 것, 우리 마음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는 주님의 부름을 따라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나선 것 아닙니까? 졸업하면서 눈물 글썽이며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고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박해와 환난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알고 시작한 길 아닙니까? 그때, 지금처럼 살게 되더라도 감사하며 살겠다고 헌신했던 것 아닙니까?

알고 보면, 승승장구할 때, 교권의 사다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고 있을 때, 만사가 편안하고 안락할 때, 좌우 앞뒤를 보아도 정과 염려 거리가 전혀 없을 때, 그때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때가 아닙니까? 그런 삶은 필경 영적 타락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교권의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 중에, 대형 교회 목회를 하며 떵떵거리며 누린 사람 중에, 유명 강사로 세계적으로 불려 다닌 사람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 저는 여럿 알고 있습니다. 공적 자리에서는 좋은 신앙인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법 기술자’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더군요. 법조계에 ‘법 기술자’가 있다면, 기독교계에는 ‘신앙 기술자’가 있습니다. 자신은 믿지도 않는 신앙으로 이익을 얻고 누립니다. 우리가 평생 목회하면서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할 일은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 앞에는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박해도 있을 것이고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교단에 아무 문제가 없고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하는 일마다 잘 되어 승승장구하면 좋겠지요? 그런 법은 없습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난 인간들이 얽혀 사는 것이 인생인데, 어찌 문제가 없고 어찌 고난이 없단 말입니까? 

그러니 고난이 올 때 두려워하지 맙시다. 어떤 일이 일어나 내 발목을 잡을까, 두려워하지 맙시다. 앞으로 교단에 어떤 변화가 올까,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지난 주간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두고 묵상하던 중에 제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메모장에 적은 말이 있습니다.

What happens happens. And so I do what I can.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앞으로 교단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We cannot control our future. But our God holds the future. And we are in His hands. 그러니 그것을 두고 지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일어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희망을 보고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이전보다 더욱 뜨겁게 손을 맞잡고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로 나가십시다. 이 길은 분명히 울며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함께 손잡고 울며 걸어가는 그 길은 분명 복되고 즐거운 길이 될 것입니다. 다른 어느 길에서도 맛볼 수 없는 신비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걸어 주님 품에까지 나갈 수 있다면, 저의 인생은 성공일 것입니다. 그 성공의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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