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감리교 역사의 첫 흑인 감독, 프랜시스 번즈

1865년 미 의회가 노예제도를 폐지한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된 지 반세기가 지난 1926년 2월 7일, 하버드 출신의 역사가 카터 우드슨(Carter G. Woodson)이 제안한 "흑인역사주간(Negro History Week)"에서 유래된 <흑인역사의달(Black History Month)>은 1976년 제럴드 포드(Gerald R. Ford) 미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지정한 후, 매년 2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업적과 공로를 기념하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의 달(African American History Month)>로도 불리는 이 행사는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1987년 아크야바 아다이세보(Akyaaba Addai-Sebo)에 의해 영국에 소개된 <흑인역사의날>은 캐나다 하원 의원인 장 어거스틴(Jean Agustine)에 의해 1995년 캐나다에도 제안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 이외에도 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흑인들의 역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흑인역사의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있습니다.)

하버드 출신의 역사가 카터 우드슨(Carter G. Woodson, 1875–1950). 사진 출처, biography.com하버드 출신의 역사가 카터 우드슨(Carter G. Woodson, 1875–1950). 사진 출처, biography.com.

연합감리교뉴스는 <흑인역사의달>인 2월을 맞이하여 해마다 감리교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흑인 지도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로 감리교 최초의 흑인 감독인 프랜시스 번즈를 소개합니다.

1858년 미 감리교(Methodist Episcopal Church)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으로 선출된 프랜시스 번즈(Francis Burns, 1809 – 1863) 목사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해방 노예들이 중심이 되어 1847년 독립한 라이베리아의 선교감독으로 섬겼습니다.

1809년 12월 5일, 뉴욕주 알바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뉴욕주 그린 카운티에서 보냈습니다. 가난했던 그의 가족은 4살의 프랜시스를 한 농부의 가정에 고용(indenture, 편집자 주: 노예는 아니지만, 머슴과 같은 존재)시켰고, 8살에는 앳우드(Atwood) 가족과 계약을 맺게 했습니다. 이때, 감리교 속회 속장이었던 앳우드 부인은 겨울 동안 프랜시스가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15세가 되던 해, 프랜시스는 침례교 목사의 딸인 백인 교사 스튜워드의 영향을 받고 회심을 경험하여, 감리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7세에는 소명을 받고 설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지만, 그때에는 그가 맺은 고용 계약 기간이 종료되지 않아, 자신의 소명에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나이 21세가 되어서야 계약은 만료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프랜시스는 뉴욕의 백인 학교였던 렉싱톤하이츠 아카데미에 다니는 최초의 유색인 학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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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그는 백인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최초의 흑인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랜시스는 교사로 일하면서 캣스킬허드슨 지역에서 설교할 수 있는 설교자 자격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능력 있는 설교를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공부를 더해서 선교사가 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랜시스는 1834년 존 세즈 목사와 함께 라이베리아에 갔을 때 그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라이베리아에서 선교사이자 지도자로 10년을 보낸 뒤, 프랜시스는 에드먼드 제인스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뉴욕으로 귀환했습니다. 다시 라이베리아로 돌아간 번즈 목사는 몬로비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845년 세이스 목사의 뒤를 이어 라이베리아 선교회의 계간지인 아프리카 루미너리(Africa's Luminary)의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번즈 목사는 또한 오랜 기간 라이베리아 연회의 의장으로도 봉사했습니다.

1856년 총회는 아프리카에서 선교감독을 선출할 수 있도록 승인했고, 라이베리아 연회는 1858년 번즈 목사를 그들의 첫 감독으로 선출했습니다. 이 선교가 지닌 감리교적 의미, 특히 라이베리아에서의 감리교적 의미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당시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아프리카 열병”의 지속적인 영향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번즈 감독은 1863년 늦은 겨울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도착한 지 3일(노예 해방이 선포된 지 3개월 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시신은 라이베리아에 묻혔습니다.

번즈 감독이 시작하고 조직하여 이끌었던 라이베리아의 감리교 사역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교인이 30만 명이 조금 넘는 연합감리교는 라이베리아 안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은 아니지만, 라이베리아의 두 대통령, 엘렌 존슨 서레프(Ellen Johnson Sirleaf, 2006-2018)와 조오지 웨아(George Weah, 2018-현재)를 배출하는 등 정치를 비롯한 공적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20개의 지방회가 있는 연합감리교 라이베리아 연회는 농업 개발병원진료소를 포함한 의료 서비스와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교육 기관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섬기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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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합감리교뉴스 Ask the UMC에서 작성한 글을 김응선 목사가 편집한 글입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email protected]이메일 또는 전화 615-742-5109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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