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아내와 같이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윤덕수’ 씨가 주인공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흥남 부두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장남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 독일에 광부로 가고, 월남전이 한참일 때 월남에 가고,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시작되자 잃었던 여동생을 찾고, 국제시장에서 장사도 한다. 나는 영화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의 사계절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열 살쯤 된 ‘덕수’ 는 6.25 사변 때 여동생의 손을 잡고 부모를 따라 피난 행렬에 낀다. 피난민을 태우던 배에 타는 도중 여동생을 잃어버리자 아버지가 여동생을 찾기 위하여 배에서 내린다. 그 때 그는 아버지와 이별하고 남은 가족과 같이 부산에 도착한다. 그의 인생의 봄은 오늘날의 어린이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청년이 된 ‘덕수’는 대학에 합격한 동생 학자금을 보태주려고 광부로 독일에 간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나중에는 월남에도 간다. 그는 그렇게 치열한 인생의 여름을 살았다.
‘덕수’는 월남에서 다리에 총을 맞아 절뚝거리는 장애인이 되어 집에 온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보고 통곡한다. 그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가해 미국으로 입양된 여동생과 극적으로 만난다. 자녀들이 자라 하나 둘 결혼하게 되면서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다. 어느덧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된 ‘덕수’씨 부부는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 가게를 인수해 장사를 한다. 자식들은 가족여행 간다고 손주들을 늙은 부모에게 맡기고 갈 때 ‘덕수’씨는 늙은 부모는 가족이 아니냐고 섭섭해 한다.
거실에서 자녀들이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백발이 성성한 ‘덕수’씨는 안방에 있는 아버지 사진 앞에서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요? 그런데 저 진짜 힘들었거든 예”하며 오열한다. 그는 아버지가 신신당부한 장남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오직 가족만을 위하여 어떤 희생과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힘든 세월에 태어나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고 말한다. ‘덕수’씨의 인생의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겨울이 가면 봄이 또 온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은 한번 가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썼던 ‘덕수’씨, 그의 삶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희생만 하다가 사라지는 바보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내어준 위대한 영웅일까? 사람마다 삶의 태도가 다를 것이다. 오늘날에도 ‘덕수’씨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할까?
십여 년 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천진한 동자승이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거쳐 장년기를 거치면서 경험한 인생사가 호수 위에 지어진 암자의 아름다운 사계절과 어울려져 그려진다. 첫 번째 산사의 문이 열리면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동자승이 물고기, 개구리와 뱀에 돌을 묶어놓는 짓궂은 장난을 한다. 그 모습을 본 노승은 잠든 아이의 등에 돌을 묶어 놓는다. 잠에서 깬 동자승이 울먹이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노승은 잘못을 되돌려놓지 못하면 평생 업이 된다고 가르친다.
두 번째 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자라 17세가 되었을 때 산사에 동갑내기 소녀가 요양하러 들어온다. 소년의 마음에 소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차오르자 소년은 산사를 떠나 그녀를 찾아간다. 세 번째 문이 열리면 배신한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된 그가 가을에 산사로 도피해 들어온다. 그는 노승이 바닥에 써준 반야심경을 새기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네 번째 문이 열릴 때 그는 노승의 사리를 수습해 얼음 불상을 만들고 겨울 산사에서 내면의 평화를 구한다. 그때 절을 찾아온 한 여인은 어린아이를 두고 떠난다.
노인이 된 남자는 어느새 자란 동자승과 함께 산사의 평화로운 봄날을 만끽한다. 동자승은 지난봄의 아이처럼 개구리와 뱀의 입 속에 돌멩이를 집어넣는 장난을 하며 해맑은 웃음을 터트린다. ‘국제시장’의 주인공은 철저하게 가족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주인공은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산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돌보던 다섯 명의 동생들을 형에게 맡기고 미국에 공부하러 온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예수는 자신이 온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마가복음 10:45). 예수는 ‘국제시장’의 ‘덕수’씨처럼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 ‘덕수’씨는 자기 아버지께 ‘이만하면 저 잘살았지요?” 라고 묻는다. 똑같은 질문을 우리를 지으신 분께 여쭈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하실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질문은 나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 물어볼 수조차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