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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1592년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로 기억하고, 일본에 합병당한 1910년을 경술국치라 하여 국권을 피탈 당한 해로 기억한다. 또 느닷없이 해방을 맞이한 1945년을 기억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을 기억한다. 이런 해의 공통점은 민족 전체가 고난을 겪고 그 고난의 결과 잊지 못할 정신적 충격을 겪으며, 그 충격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남긴 깊은 상흔을 트라우마, 즉 정신적 외상이라 부른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민족적으로 심대한 정신적 충격을 겪은 해가 기원전 587년이다. 이 해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나라는 망했는데, 이것을 바빌론 유수(Babylonian Exile)라고 한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고 깊은 충격을 주었고, 왕국과 성전이 신의 약속으로 보호받는 특별한 곳이라고 믿었던 그들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신성한 공간이 파괴되고 지도자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힌 것은 단순한 물리적 패배가 아니라 실존적 위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도적 상실감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재검토해야 했다.
지난번 이야기를 다시 기억해 보자면, 이 위기를 바라보는 다양한 해석이 등장했다.
- 첫 번째 해석으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에게 패배했다고 믿었고, 그 결과 야훼 신앙을 버리고 바빌론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이런 입장은 성경과 무관하게 신앙을 버린 이들의 입장이다.
- 두 번째 해석으로,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고통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신명기적 해석(Deuteronomistic Historical Viewpoint)으로 알려진 이 견해는 순종하면 축복, 불순종하면 심판이라는 신학적 시각으로 이스라엘의 패망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고 보고 회개하면 회복된다는 믿음을 강조했다. 이런 신명기 학파가 가장 주도적 입장이 되었고, 이분들이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편찬했고, 역사서(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이런 신명기적 역사관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들의 모음집이고,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이런 신명기적 역사관을 선포한 예언의 모음집이다. 즉 모세 오경의 원리가 선포된 것이 예언서, 그 선포를 역사적 사건으로 입증한 것이 역사서다. 이것이 구약 성경의 주류 입장이다.
- 세 번째 해석은, 민족적 패망과 고난은 이스라엘의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신앙을 입증할 기회라고 보는 것으로 지혜 문학(욥,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에 나타난다. 지혜서는 고통에 대한 신명기 학파의 단순한 인과관계에 이의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 욥은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예배드리고 신앙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다.
- 시편은 너무 힘들어서 애통해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탄원시조차도 마지막은 찬양으로 끝나고 찬양시는 아예 찬양만 있다.
- 잠언은 바빌론의 포로가 된 이들의 일상에서조차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한다. 일상에서 거룩함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 전도서는 세상의 승리와 영광이란 몹시도 헛되며,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공과 축복을 위한 신앙생활 자체를 헛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아가서는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뿐이며 여기에는 상벌이 아예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아가서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의 요약이라고 하는 말씀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아놓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입장은 물리학으로 말하면 뉴턴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의 관계와 같다. 일상에서는 뉴턴 물리학처럼 우리가 속도와 방향을 알면 언제 어디에 사물이 있을지를 예측해서 인공위성이나 로켓이 정확하게 달에 가고 지구로 귀환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미시 세계로 가면 어떤 입자가 어떤 위치에 있을지 예측할 수 없고, 심지어는 입자인지 파동인지도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일상에서는 신명기적 원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받고 불순종을 피하여 저주를 막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다. 그런데 어떤 특정 분야에서는 공동체에서 해석한 성경적 기준이 흐려지면서 어떤 것이 순종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불순종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지는 지점이 나온다.
기하학에서도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르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도인데 리만 기하학에서는 180도가 틀린 답이 되고, 평면이 아닌 구면에 그려진 삼각형의 세 각을 계산하는 새로운 공식이 필요하다. 바로 이와 유사한 것이 남녀의 성차별, 동성애자 인권과 관련된 문제에서 현재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와 교인들이 다른 입장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 여정을 더 복합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 신명기 학파를 따르는 이들 가운데도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 예배와 관련된 정결과 거룩의 규정에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제사장 학파와
- 사회 정의와 실천적 윤리 규정에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예언자 학파로 나뉜다.
제사장 학파는 정결 규정을 강조하고, 그것을 어겨서 나라가 망했으니, 회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정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순수 혈통과 극단적 정결을 강조한다. 그 예로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귀환한 후에 이방 민족과 결혼한 것을 파혼시키고 사마리아를 부정한 땅이라고 공격하는 일에서 보게 된다.
예언자 학파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 사회적 빈부 격차가 멸망의 원인이므로 회복을 원하는 자,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의 예언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이처럼 학파 간의 다양한 경쟁적 목소리 외에도 다양성을 확대하는 또 한 가지 요인이 더 있다. 그것은 어떻게 민족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대응책에서 비롯된다.
- 국가의 멸망과 민족의 소멸이라는 실존적 위협에 직면한 바빌론 유수 공동체에서는 생물학적 후손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선 후손이 끊어지면 민족이 사라진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불임 여성의 기도와 노력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라가 노년에도 아이를 낳고,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잠들게 한 후 관계를 가져 아이를 낳고, 레아와 라헬은 아이 낳기 경쟁을 하고, 한나는 울면서 기도해서 아이를 낳고,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아이를 낳는다. 형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남동생이 형수를 임신시켜 아이를 낳고, 평소에 상종하지 않던 모압 여인도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주면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고 역사에 길이 남아 기억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런 예를 따를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성경이 추구하는 민족의 생존이라는 맥락에서는 자손을 낳을 수 없는 동성애는 공동체의 생존에 직접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오난의 이야기에서처럼 심지어는 씨를 땅에 버리는 행위까지도 미래 세대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상징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처벌을 받았다.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다.
- 하지만 생물학적 후손을 얻은 이후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자손이 과연 신앙적 정체성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아브람의 생물학적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을 허락하시고 이름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다. 자기 자식의 아버지(아브람)가 아닌 많은 민족의 아버지(아브라함)가 되라고 하시면서 생물학적 조상이 아닌 믿음의 조상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둘 다 생물학적 자손이지만 믿음의 후손은 야곱이라고 따로 구별하신다. 세례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자랑이 아니고 신앙적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탄생한 다양한 입장을 동성애 문제에 적용해 보면, 신명기적 역사관을 가진 제사장 학파(1)와 예언자 학파(2) 사이의 조합과 더불어 생물학적 자손(A)과 믿음의 자손(B)의 조합을 고려해서 동성애나 인간의 성 문제에 대해서 다음 네 가지 입장이 나온다.
- 제사장 학파로 생물학적 자손을 강조하는 사람들 (1+A) - 동성애자를 받아들일 수 없음. 부정하고 후손을 낳을 가능성이 없음.
- 제사장 학파로 믿음의 자손을 강조하는 사람들(1+B) - 동성애자를 받아들일 수 없음. 후손을 낳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결 예법에 따라 부정함.
- 예언자 학파로 생물학적 자손을 강조하는 사람들(2+A) - 동성애자를 받아들일 수 없음. 부정하다는 생각은 없지만 후손을 낳을 가능성이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음.
- 예언자 학파로 믿음의 자손을 강조하는 사람들(2+B) - 동성애자를 받아들임. 사회 정의의 입장에서 인권을 지켜주어야 하고, 믿음의 자손만 퍼뜨리면 공동체가 사라지지 않음.
신명기 학파의 입장이 아닌 지혜문학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동성애자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무한 포용이 가능하다.
이것은 모세 오경과 지혜문학 다섯 권의 두 가지 다른 입장으로 뉴턴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을 동시에 활용해서 현실을 이해하고, 유클리드 기하학과 리만 기하학을 동시에 활용해서 응용하듯이 우리가 동성애와 관련된 성경적 입장을 정리할 때 살펴보아야 할 선택지들이다.
즉 동성애자 포용을 반대하는 분들은
- 신명기적 역사관을 가진 제사장 학파나 예언자 학파의 입장을 따르거나
- 예언자 학파 중 생물학적 대를 잇는 것을 중시하는 분들이고,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분들은
- 신명기적 역사관을 가진 분 중에서 예언자 학파지만 믿음의 대를 잇는 것이 생물학적 대를 잇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분들이거나,
- 아예 지혜문학적 입장에서 신앙은 율법에 대한 순종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내가 옳고 남은 틀렸다가 아니라 각자 어떤 입장에 속하는지, 왜 그런지를 이해하고, 아 저분은 나와 다른 입장인데 그 이유는 그런 것이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이 여러 입장 중에서 어떤 입장이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가르쳐주실까?
다음 글에서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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