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상용화 소식에 우리는 안도의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감염병 대유행의 위협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바이러스가 완전히 퇴치되지 않는 한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연합감리교뉴스는 ‘코로나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대의 기독교 시리즈’를 매주 연재한다. 오늘은 이 시리즈의 여덟 번째로 김영봉 목사의 글을 소개한다.)
뉴노멀(New Normal)과 올드노멀(Old Normal)
화이자와 모더나 그리고 아스트라제네카가 연달아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꽁꽁 얼려 버렸던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희망을 품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의료진으로부터 시작된 백신 접종이 점차 일반인들에게로 확대되면서, 2021년도 하반기에 이르면 인구의 70% 이상이 집단 면역을 형성하고, 이어 팬데믹의 종식을 고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1918년 2월에 발병하여 2년 2개월 만에 종식된 스페인 독감에 비하면, 어쩌면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사태가 끝난 후,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많은 사람이 현재 우리에게 불시에 불어닥친 이 뉴노멀의 상황이 임시적 현상이 아닌 항구적 상황이 될 것이며, 환경파괴로 인해 코로나바이러스와 유사하거나 그보다 더 전염력과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우리의 생활을 위축시킬 것이라 예견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팬데믹이 종식되면 올드노멀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 온 올드노멀의 생활 방식은 수천 년에 거쳐 형성된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편안하고 유익하게 조정되고 유지되다 고정된 것이며, 인류가 가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대처 능력과 회복 탄력성 그리고 놀라운 망각의 능력으로, 팬데믹이 끝난 후 인류는 신속하게 올드노멀의 상태로 돌아가리라 예측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후자의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진 않지만, 나에게는 후자가 왠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환경을 파괴하는 인류의 능력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간의 대처 능력과 해결 능력 또한 그에 못지않기에, 이 사태가 끝난 후 달라지는 것들이 있음에도 개인이 누리던 삶의 기본적인 모습과 형태는 대체로 유지될 것으로 생각한다.
둘 중 어떤 예상이 맞을지는 몇 해만 지나도 판명이 날 것이기 때문에, 이는 두고 보기만 해도 충분한 문제다.
정작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사안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뉴노멀의 상황으로부터 교훈을 찾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정상적인 삶의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그로 인해 반성과 자각이라는 선물도 발견하게 된다. 나 역시 팬데믹으로 인해 뉴노멀의 상황에 이르고 보니,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올드노멀의 삶을 하나하나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얻은 반성과 자각은 뉴노멀의 지속이나 올드노멀로의 회귀와 상관없이 앞으로의 삶을 이끌어가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뉴노멀의 상황에서 올드노멀을 돌아보고 얻은 신학적 반성을 나누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중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뉴노멀은 우주적 대격변도 아니고, 신이 내린 새로운 계시의 사건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팬데믹이 신론이나 기독론 혹은 성령론이나 구원론 같은 근본적인 신학 영역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은 반면, 우리의 삶에 관계된 영역 즉 교회론과 목회신학, 제자도와 평신도 신학 같은 영역에는 충격적일 만큼의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교회론과 목회신학
올드노멀 시대에 교회는 모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감염병 확산을 통제하기 위해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어 모임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제한적으로 모임이 허락될 때에도 감염에 대한 우려로 모이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시점은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의 상황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쟁 중에도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다고 하고, 미국에서는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막을 수 없다고 소리를 높인다. 모이지 않는 것을 마치 교회 됨을 포기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는 교회론에 대한 반성과 그동안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사랑의 코이노니아’다.
코이노니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의 하나님과 사귐을 통해 한 몸으로 연합된다. 이렇게 사랑의 코이노니아로 하나 된 교회는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을 이어가게 된다.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보통 ‘교제’ 혹은 ‘사귐’으로 번역되지만, 당시 코이오니아가 ‘동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이 오역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코이노니아를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결속시켜 주는 소속감과 연대감으로 보았고, 이 연대감을 표현하기 위해 몸을 비유로 사용했다. 즉, 바울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으로 결속된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물리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세상을 섬기는 것은 사랑의 코이노니아에서 나오는 표현이며, 그 활동을 통해 다시 사랑의 코이노니아가 심화되고 강화되는 것일 뿐, 교회의 심장이 ‘모임’은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물리적으로 모여 활동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심화시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본질을 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에, 본질을 기억하는 동시에 의식적이고 지속적으로 그 본질을 지키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이다.
팬데믹의 상황은 교회에 자가 검진의 기회를 제공했다.
물리적으로 모여 물질을 나누는 형식적 코이노니아를 중단시킴으로 내면적이고 실질적인 코이노니아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뜻이다.
올드노멀 시대에 사랑의 코이노니아 형성을 위해 힘써온 교회들은 대면 예배가 중단되었음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몸으로 모이지는 못해도 교인들 사이에 형성된 강한 영적 결속과 물리적 연대감이 교회의 기능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올드노멀 시대에 온갖 모임과 프로그램으로 많은 교인을 동원했지만, 신자들 사이에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형성하는 일에 소홀했던 교회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 영상은 교인의 수보다 월등히 많은 접속수를 기록했지만, 소속감이 약한 교회들의 경우에는 교인수에 비해 현저히 낮은 접속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필시, 이런 교회들은 코로나 사태가 종식된 이후 몰라보게 수척해진 자신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의 현 과제는 올드노멀 시대의 교회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영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팬데믹으로 인한 한계적인 상황에서도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심화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
물리적으로 모이는 것이 코이노니아를 심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일에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물리적으로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제한적인 지금, 교회는 다른 것에 신경 팔지 말고 사랑의 코이노니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황이 끝난 후 올드노멀 상태로 돌아갈 경우, 그렇게 준비된 교회는 본질을 유지할 수 있고 본질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도 뉴노멀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기간 들였던 우리의 노력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좋은 대비가 될 것이다. 만일 올드노멀식의 교회 활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방향으로만 계속 노력한다면, 결국에는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교회들은 탈진하게 될 것이고, 올드노멀이 회복될 경우 여전히 스스로를 허비하고 교인들을 들볶던 옛 잘못을 반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도와 평신도 신학
코로나 사태는 올드노멀 시대의 영성 생활을 정지시켰다.
교회에서 행하는 활동을 신앙생활이라 부르며, 교회 활동의 정도가 영적 성장의 척도라고 가르쳐오던 올드노멀 시대의 교회는 그간 여러 종류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을 유행시켰고, 그로 인한 다양한 성공사례가 나오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훈련시킨다는 취지아래 교회를 위한 충성스러운 교인을 만들어내는 결과만을 낳았다.
하지만 여태껏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교회 중심적이고, 교회 의존적으로 살아왔던 교인들을 교회로 모이지 못하게 하자 그들의 영성 생활에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올드노멀 시기에 강조하던 신앙생활이 중단되어, 결국 믿음의 뿌리가 깊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올드노멀로 돌아가기까지 버티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 공백 기간에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렇게 팬데믹 사태는 교회로 하여금 자가 검진을 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동안 교회가 가르쳐온 제자도 훈련을 통해, 대다수의 신앙이 의존적이고 타율적으로 형성되고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교회 활동이 불가능한 뉴노멀의 상황에 처하고 보니 자신의 영성이 얼마나 허약한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제자도와 평신도 신학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제자 훈련으로 교회에 필요한 ‘교회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은 목회자들에게 큰 유혹이다. ‘교회 사람’을 얼마나 많이 키우느냐가 목회의 성공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찾는 제자는 ‘교회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 세상 안에서 세상의 변화를 위해 섬기는 진정한 ‘세상 사람’ , ‘시장통의 수도자’로 일상생활 속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 말이다.
교회는 이러한 삶의 방법을 함께 배우고 연습하는 모임이어야 하며, 한 몸으로 연합하여 세상을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세상으로 흩어지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개신교 평신도 신학의 바탕은 만인제사장직이다.
레위 제사장직에서의 평신도가 지극히 의존적이고 타율적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대치된 만인 제사장직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있다.
만인제사장직에서 목회자는 제사장이 아니고, 교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을 성직으로 받들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영적 제사를 드리고, 다 함께 연합하여 제사장 공동체를 이루고, 세상을 섬기면 된다.
흔히들 ‘위기’를 ‘위험이 만들어 준 기회’라고 해석한다.
팬데믹은 목회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교회 모두에게 위기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올드노멀 시대에 깨닫지 못하고 지내던 우리 자신의 병적 상태를 제대로 자각하고 건강한 영성과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노력한다면, 이번 팬데믹이 끝난 후에 뉴노멀이 지속되든 올드노멀로 회귀하든 교회는 든든히 서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팬데믹으로 인해 광야로 내몰려 얻은 신학적 반성의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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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본 코로나 시대의 교회: 생명 생태계, 하나님 나라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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