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글 목사님을 추모하며 - 진짜 선교사, 선한 목자 조지 오글 목사님

내가 조지 오글 목사님을 처음 만난 날은 1981년 북일리노이 연회의 첫날 저녁이었다.

몇 주 전에 세상을 떠난 007 영화의 주인공 샨 코넬리보다 더 멋진 영국 신사 같은 분이 오시더니, 갑자기 “아이고, 여기 우리 한국 사람들 만나니 좀 살 것 같네.” 하시며, 첫 만남부터 격 없이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그분의 친화력과 한국어 실력에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오글 목사님은 그 후에도 매년 연회 첫날 한인 목회자들 모임에 참석하셨다.

미연합장로교회 파송 조지 타드 목사님이 조지송 목사님과 박형규 목사님 같은 어른들과 한국 산업선교의 한 기둥을 세우셨다면, 연합감리교회의 조지 오글 목사님은 조화순 목사님과 조승혁 목사님 등 초기 감리교 산업선교 리더들과 또 다른 한 기둥을 세우신 분이다.

오글 목사님은 또한 ‘인혁당 과부들의 아버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국가권력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서둘러 사형당한 그들의 아픔과 조작된 사건으로 인한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목회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오글 목사님은 한국으로부터 강제추방을 당했다. 하지만 오글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냈고,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에도 지대한 역할을 감당했다.

오글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내가 아틀란타에서 목회할 때였다.

오글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따님이 살던 아틀란타 근교 마리에타에 살고 계셨는데, 그때 오글 목사님을 위한 ‘선교사 은퇴찬하 모임’을 아틀란타 한인교회가 주관하여 치르면서, 한국 교계 대표로는 조승혁 목사님이, 교단을 대표해서는 당시 감독이셨던 김해종 목사님과 함성국 목사님이 오시고,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내신 제임스 레이니 목사님도 함께 자리에 참석하셨다. 제임스 레이니 목사님과 오글 목사님은 선교사 동기생으로 친분이 두터우셨다.

레이니 목사님이 나에게 왜 오글 목사님의 은퇴찬하 모임을 주선했는지 물으셨고, 나는 “우리가 조지 오글 목사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잊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국에 민주 정권이 들어선 후, 오글 목사님이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실 때마다 나는 그분의 연설문을 번역하고 타자쳐서 드렸다. 글자를 크게 해 드리면서, 007 영화 제목인 ‘For your eyes only’라고 밑에 써드리곤 했던 기억도 난다.

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해외민주인사 초청 행사 당시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과 만난 조지 오글 목사(왼쪽부터). 오른쪽에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도로시 오글 여사가 함께했다. 사진 제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해외민주인사 초청 행사 당시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과 만난 조지 오글 목사(왼쪽부터). 오른쪽에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도로시 오글 여사가 함께했다. 사진 제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 번은 2002년 김대중 대통령 초청으로 부산 평화공원 개막식에 다녀오시면서, “김 목사, 내가 김영삼, 김대중 두 분 사이에 앉았는데 너무 불편했다. 두 분이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안 하더라. 그래서 내가 두 분 손을 잡고, 악수하도록 만들었더니, 민망한지 두 분이 나를 보고 씩 웃더라. 아이고 왜 그래야 하나. 옛 동지들이 친하게 사는 것 보고 싶은데… 아이고 마음이 아프더라.”라고 하셨다.

오글 목사님은 복음주의연합형제교단(Evangelical United Brethren, EUB) 출신답게, 예수 사랑의 복음이 삶에 육화된(incarnated) 목회자셨다. 심각하고 치열한 선교 현장에서 사람을 키워내실 때도, 언제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 사랑의 정신을 놓지 않으셨다.

특이한 것은 사회정의 인권투쟁에 앞장서시는데도 오글 목사님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맑음과 인생에 대한 자유 그리고 즐김이 있었다. 

은퇴하신 후에도, 북미주 기독교 통일운동에 그분의 역할이 필요해 전화를 드렸더니, “김 목사, 나 괴롭히지 말아라. 나 은퇴하고 꼭 하고 싶었던 것 하느라 요즘 정신이 없다.”하셔서, 내가 “무엇을 하시는데 그러세요.”라고 물었더니, 깔깔 웃으시면서, “피아노 배워. 너무 재미나. 딩동딩동 피아노 치는 게.”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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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오글 목사님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60-70년대에 감당하셨던, 그 대단한 일에 관해 전혀 과시하는 일이 없으셨고, 늘 사람을 만나면 따듯하게 격려하고 사랑하는 어른의 역할만 감당하셨다.

결국 나의 ‘꼬임’에 넘어가시어, 우리들이 하지 못하는 어려운 일을 감당해주시기도 했는데, 한 번은  북한에 다녀오시는 길에 백두산 십자가 두 박스를 배달해주셨다. 무거운 짐을 건네주시며, “아이고, 김 목사 못 돼먹었다. 늙은이에게 이런 일이나 시키고. 그런데 이거 가지고 오는 길은 내가 진짜 007 영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재미났어.”라고 말씀하셨다.

오글 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시도 쓰셨고, 그중 일부를 나에게 보내주시며, “좀 괜찮은지 봐줘라. 열심히 쓰는데 아이고 잘 안되네.” 하시며 소년처럼 긴장도 하시고, 좋아도 하셨다.

암 투병을 위해 따님이 있는 덴버로 떠나시기 전, 내가 섬기던 교회에 오셔서 박스 두 개를 건네주시며, “이거 내가 한국에서 선교사역 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자료들이야. 소중한 것들인데… 이제 김 목사가 좀 지켜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조지 오글 목사님이 우리 감리교 대선배 어른이신 손명걸 목사님과 신학교 기숙사 룸메이트로 지내실 때, 손 목사님이 오글 목사님에게 오명걸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조지 오글 목사님이라고 하면, “오명걸이라는 좋은 이름있는데, 왜 자꾸 미국 이름 부르냐?” 하시면서 웃곤 하셨다.

나는 지금도 오명걸 목사님과 도로시 사모님 같은 미국 분들의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과 애정이 신기하다. 그래서 항상 그분들께 감사하면서도 왠지 한편으로는 부끄럽다. 실제로 한반도 인권과 민주화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실무에는 도로시 사모님이 늘 그 중심에 계셨다. 사모님은 남편의 투병 생활을 도우시면서 동시에 평화통일에 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끊임없이 담당하셨다.

오글 목사님은 고난의 역사, 그 중심에서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한 진정한 선한 목자셨다.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잘 아시면서도 비판하지 않고, 갈라진 동지들의 손을 맞잡게 하시고 언제 만나도 따뜻한 웃음과 칭찬으로 격려해 주셨다.

1971년 7월 4일, 조오지 오글 목사가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떠나기 전, 소속 목사로 있던 인천 숭의감리교회에서 송별회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맨 앞줄 가운데) 오글 목사와 당시 감독이었던 이호문 목사(후에 대한기독교감로회의 감독에 피선되었다)가 나란히 앉아있다. 사진 제공, 이선목 목사, 숭의감리교회. 1971년 7월 4일, 조오지 오글 목사가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떠나기 전, 소속 목사로 있던 인천 숭의감리교회에서 송별회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맨 앞줄 가운데) 오글 목사와 당시 감독이었던 이호문 목사(후에 대한기독교감로회의 감독에 피선되었다)가 나란히 앉아있다. 사진 제공, 이선목 목사, 숭의감리교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좋은 분에 대한 기록이 많지가 않다.

한국 신앙과 지성사에서 출판한 오글 목사님이 쓰신 역사소설 ‘기다림은 언제까지 오 주여! – 20세기 한국의 이야기(How Long, O Lord: Stories of Twentieth Century Korea)’와 몇몇 뉴스 기사가 전부다. 이 책을 자원봉사로 번역하신 함정례 목사님과 출판 비용을 감당했던 아틀란타 한인교회에 감사를 드린다. 향후 오글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하려는 준비의 손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에 거는 기대가 크다.

함정례 목사님의 남편인 고 정춘수 목사님은 오글 목사님의 절친 손명걸 목사님의 뒤를 이어 연합감리교 세계선교부 아시안선교 총무를 지내셨다. 정춘수 목사님은 오글 목사님의 제자인 조화순 목사님 밑에서 전도사를 지내셨는데, 그분 또한 내 목회의 멘토가 되신 분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오래전 떠나신 정춘수 목사님과 손명걸 목사님을 생각한다. 오글 목사님과 마찬가지로 이분들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선교적 사명에 대해 분명한 비전과 헌신이 있으셨던, 우리가 항상 목말라 하고 그리워하는 ‘어른’들이셨다.

오글 목사님이 떠나셨다. 참 그립다. 오글 목사님을 그리워하면서, 어른스럽고 덜 부끄러운 목회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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