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글은 오치용 목사가 2019년 한인총회 세째 날 저녁 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이다.
마태복음 13장 31-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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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목회자에게 이런 자리에서 말씀을 나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목회 이야기를 하라고 세우신 줄로 이해하는데, 제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편이라 부담이 됩니다.
저에게 9학년 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주일 일정을 모두 마치고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에 남았는데 엄마랑 먼저 집에 간다고 나서던 딸이 돌아서더니 갑자기 작심한 듯 말을 건넸습니다.
“아빠!, 진짜 대충하라고. 아무도 설교 안 들어. 다들 스마트폰하고, 졸고, 들어도 이해 못 한다고. 그냥 적당히 해도 돼. 그러다 아빠 쓰러지면, 딸 대학 가는 것도 못 보고 죽을 거냐고!!" 아빠를 걱정하는 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어바나 샴페인에 있는 예수사랑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시카고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반 내려오면 우리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일리노이주립대학교가 있고요, 그 캠퍼스 한가운데 우리 교회가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많이 유학을 오는 학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캠퍼스 선교를 위해 세워진 교회로, 올해 24년이 되었습니다. 윤국진 목사님께서 개척하시고 15년간 목회하셨고, 저는 네 번째 목사입니다.
목회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지금 교회에서 두 주간 임시로 설교할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건 놀고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제가 가겠다고 했습니다. 시카고에 있는 4년 동안 저는 샴페인을 샴버그로 알고 있었습니다. 샴버그는 제가 있던 동네에서 40분 정도 걸립니다.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보니까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두 주간 그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두 주 후 목사님이 갑자기 사임하셔서, 임시로 설교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6주 동안 두 시간 반 거리를 오가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교회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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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청년 목회를 해 본 적도 없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마흔세 살의 나이에 청년 목회를 시작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학생들과 말씀 나누는 것도, 함께 어울려 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습니다.
얼마나 좋고 재미있었는지 처음에는 성경 공부를 한 학기에 6개, 7개까지 했습니다.
제 돈으로 매 끼니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식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지내던 3년 동안은 매일 밤 10시, 11시에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렇게 학생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4년 가까이 돼갑니다.
지금은 교회에 대학생들이 100여 명, 대학원생들이 20여 명 그리고 몇 가정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저보다 나이 많은 교인은 세 분 계십니다.
교회가 캠퍼스 한가운데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 중심의 교회가 되어, 20대, 30대 초반의 학생들이 임원도 하고, 대표 기도도 하고 교회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교회 특징 중 하나는 신앙이 없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매년 여름, 서울에서 신입생들을 위한 행사를 엽니다. ‘멘토링 파티’라는 이름으로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줍니다.
가을 학기가 시작돼서 신입생들이 캠퍼스에 오면 정착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합니다. 교회 문턱을 낮춘 여러모임을 통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신앙이 있는 친구들과 없는 친구들의 구분 없이 교회 안에서 함께 어울립니다.
교회 안에는 신앙이 있는 친구들과 없다고 여겨지는 친구들의 비율이 반반입니다.
교회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나와서 당연히 신앙 있는 줄 알았던 친구들도 대화를 나눠보면,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친구들도 꽤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기본적인 이야기라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 모른다고 생각하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를 가능한 한 쓰지 않으려고 하고 좀 더 쉬운 말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처음 신앙을 접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습니다.
몇 주 전 한 박사 과정 학생이 이메일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겠냐는 문의였습니다. 결혼하려고 하는데 여자 친구와 장인 장모 될 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전제를 내건 겁니다. 그래서 일단 오라고 했습니다.
만나서 세례가 뭔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세례는 받고 싶다고 해서 받는 게 아니고 자기 신앙 고백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정은 본인이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결정을 하고 몇 주 동안 책을 하나 줘서 읽어 오게 하고 둘이 만나 마주 앉아 신앙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자기 이야기도 솔직히 나눠주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성토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장인, 장모 될 분들이겠지요.
그렇게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저에게 고마워했지만 사실은 제가 더 고마웠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과 신앙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보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신앙이 없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교회이자 동시에 선교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4년을 전후로 대부분의 사람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와서 1년이 지난 가을 열두 가정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30여 명 이상의 학생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매해 그렇게 학생들이 떠났습니다.
어느 날 한번 세어 봤더니 지난 4년 동안 약 130여 명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첫해 찍었던 단체 사진의 사람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이 총회를 끝내고 돌아가면 이번 주일에 20명 정도를 또 떠나보내야 합니다.
보통 이런 걸 교회에서는 파송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훈련해 다른 교회나 지역으로 파송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말이 좋아 파송이지 생이별입니다. 이별은 아무리 자주 해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 상실감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학기마다 일꾼들의 빈 자리를 메워야 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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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작가 이외수씨 아내가 인터뷰한 기사를 봤습니다.
참 고생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43년간의 결혼 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 행복했고 다 지겨웠어요.”
이 말이 그렇게 공감이 됐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목회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명을 따라 하는 일이니 분명히 행복한 일이지만, 때로는 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지겹게 느껴지는 일이, 왜 없을까요?
저도 ‘목회가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은’ 시간을 지난 1년 동안 겪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교회 일을 모두 마치고 집에 왔는데, 집 문 앞에 빈 냄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한 가정이 교회를 떠난 줄도 모르고 아내가 음식을 담아 보냈는데 그 냄비가 빈 채로 돌아온 겁니다.
여느 때 같으면 무언가 담겨 돌아왔을 냄비가 빈 채로 돌아온 것이 한 가정이 떠난 현실을 가슴 서늘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매 주일 교회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안방 옷장에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어느 날 제가 거기 들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숨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기가 죽어 있으니까, 아내와 딸이 안타까웠는지 어느 날 쇼핑 같다가 풍선을 사 왔습니다.
풍선에 뭐라고 쓰여 있었냐면, “You are so special!” 집에서 1, 2층을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그 풍선을 들고 다녔습니다.
개인 상담을 계속 받고, 트라우마 세미나도 다녀왔습니다.
처음 겪어 보는 일들, 그런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책도 사서 읽었습니다.
여기서 그만할까 몇 번을 망설였는데 버텨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가족들이 큰 힘이 됐습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지난 가을 학기 말에 처음으로 도서관 투어를 해봤습니다.
간식 패키지를 만들어 캠퍼스 곳곳을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비 오는 어두컴컴한 시간, 패키지를 담은 가방을 등에 메고 양손에도 한 봉지씩 들고 캠퍼스와 도서관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학생들의 반응이 훨씬 좋았습니다. 정말 고마워하는 겁니다. 힘들었는데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일이 가장 쉽다고 하는데 ‘아니구나, 어렵구나. 학생들에게는 제일 어려운 일이구나. 학기 말이라 힘들고 지쳐 있었는데 그래서 더 고마워하는구나’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아! 내가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싶었습니다. 그동안 잘 모르는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열심히 해왔는데 학생들의 현실과 내 인식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멀었는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자기 아픔에 공감해 줄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어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조금씩 목회를 배워가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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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설명하실 때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논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도 그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습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씨가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됩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는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겨자는 풀입니다.
그런데 나무처럼 크게 자란다는 겁니다. 비유 특유의 과장법입니다.
그저 작은 씨 하나를 심었을 뿐입니다.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자라나는 과정도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모든 생명을 품에 안은 커다란 나무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겨자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보는 듯합니다.
우리 교회는 본의 아니게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작은 씨앗을 심었을 뿐입니다. 24년간 그렇게 꾸준히 믿음을 나누고 흩어졌다면 어딘가에서는 그 열매들이 맺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열매가 어디서 얼마만큼 맺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걸 보지 못하니까 힘든 겁니다.
보지는 못하지만, 어느새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고 살아가려면, 필요한 게 뭘까요? Imagination, 상상력입니다.
“아주 작은 씨가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이 있어야 합니다. 농부들이 씨앗을 심을 때 그게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걸 상상할 때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것처럼, 상상력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은 비현실적인 생각이나 근거 없는 허황한 꿈과는 다릅니다.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상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믿음과 유사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말씀이 그걸 말합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 오지도 않았지만, 상상하는 것입니다. 상상하기 시작할 때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은 실제가 됩니다.
성경은 온통 상상력의 세계입니다.
에스겔 예언자는 골짜기에 가득했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생기와 만나, 거대한 군대로 다시 살아나는 상상을 합니다. 성소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죽었던 물이 살아나고 나무들이 열매를 맺는 상상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나라와 나라가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합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며 함께 어울리는 세상을 상상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실 때 자신의 사역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해방이 선포되며, 눈먼 사람들이 눈을 뜨고, 억눌린 사람들이 풀려나는 상상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 사이의 모든 경계와 구분이 사라지는 상상,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낮아지는 삶에 대한 상상, 섬김을 받는 게 아니라 섬기는 삶에 대해 상상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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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을 봤을 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상상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옆에 사람 하나 사랑하기도 어려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상상을 하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 용서하는 일도 수많은 고통과 고민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가능할까 말까 한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면서 살라는 상상을 하라고 하십니다.
작은 일에도 염려하고 찌들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며 살라는 상상을 요구하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상상력이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까지 밀어붙인 것입니다.
이런 성경을 읽고, 이런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의 상상력은 빈곤하기 그지없습니다.
현실에 눌려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고 움츠려 있을 때가 많습니다. 눈앞에 닥친 일들에 대응만 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씨앗을 심고는 있지만, 그 씨앗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의심과 회의 속에 있을 때도 많습니다.
상상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도,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도 상상력이 결핍된 사람에 의해서 세계가 심하게 축소됩니다.
문자주의에 갇힌 사람들에 의해, 산문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제한된 시선으로만 세상과 하나님을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삶과 신앙은 심하게 축소됩니다.
반대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분의 말씀에 기대어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에 의해, 산문이 아닌 시인의 언어를 통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상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기 삶을 활짝 개방한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실제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커다란 나무는 단순히 양적으로나 수적으로만 커진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건 상상력의 결핍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는 말을 들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공중의 새들’이라고 빗대어 불렀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들어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쳐 놓았던 경계의 울타리가 허물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한 없이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품지 못할 사람이 없을 만큼 커다란 세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절대로 믿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복음을 영접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는 없을까요?
문제 많던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는 없을까요?
주님이 꿈꾸셨던 구별과 차별이 없는 세상, 누구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요?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는 없을까요?
태평양을 건너왔던 한국인들의 신앙이 미국연합감리교회에 새로운 날을 가져올 거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을까요?
상상하는 것 외에 어떻게 우리 한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상상력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그래도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맞습니다.
어떻게 작은 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는 상상이 현실적으로 보이겠습니까? 우리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공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께서 이루십니다.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제한된 상상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제한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상력이 믿음입니다.
저는 계속 작은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하겠습니다.
오치용 목사는 그레이트플레인즈연회의 어바나 샴페인 예수사랑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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