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도시 한 가운데에는 칼뱅이 태어나서 수 개월간 살았던 생가가 아담하고 깨끗하게 박물관으로 단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방치되었던 이 집은 1983년 프랑스개신교회사협회와 느와용시 그리고 프랑스 문화성의 후원으로 다시 태어났다.1)
그의 생가가 박물관으로 단장을 마친 후, 한국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칼뱅을 존경하는 개신교인들과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5월 어느 금요일 오후, 박물관 안내인은 한국말로 인쇄된 박물관 안내 책자가 동나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한국인들의 단체 방문이 예약되어 있다고 귀띔했다.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느와용에서 태어났다. 도시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대성당의 재정 담당 변호사이자 주교의 비서였던 아버지 덕에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1523년 14살의 나이로 파리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성직자 과정을 밟으려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기초학문과 인문학을 주로 공부한 칼뱅은, 1527년 그의 아버지가 느와용에서 출교당하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를레앙(Orléans)으로 학교를 옮겨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153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칼뱅은 다시 파리로 돌아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며 인문주의 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칼뱅이 언제부터 개혁주의자로 전향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한 고백에 따르면, 소년 시절 그는 느와용 대성당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미 가톨릭이 잘못된 종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파리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와 오를레앙의 뛰어난 법학자 삐에르 레토알(Pierre L’Etoile) 및 파리 개혁주의자들의 모임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개혁가로서의 고달픈 인생이 시작되는 1533년, 그해 11월 1일(만인성도의날, All Saints’ Day) 함께 공부했던 친구 니콜라 꼽(Nicolas Cop)이 소르본대학 학장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그는 그 대학의 가톨릭 신학자들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자신이 프랑스 인문주의자들과 루터의 설교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대학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그 연설문을 함께 작성했다고 의심받는 칼뱅과 연설을 했던 꼽은 피신 해야 했다.
잠시 피신한 스위스 바젤의 친구 집에서 칼뱅은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1536년 첫 번째 인쇄본이 스위스 바젤에서 출간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따스한 햇살과 푸른 하늘이 조화로운 5월의 아침,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한국말로 인쇄된 박물관 안내 책자가 동났다던 박물관은 매우 조용했다. 관람객이 없기도 했거니와 전시물도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전시물 대부분이 원본이 아니었고, 유일하게 관심을 끌 만한 것이라곤 3층에 전시된 칼뱅의 <1559년 기독교강요> 원본과 <1559년 불어 성경>뿐이었다.
장로교를 창시한 저 유명한 신학자의 생가가 이렇게 초라하고 부실한 이유는 누구나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정치와 결탁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가톨릭이 반역자 칼뱅의 생가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프랑스 역사상 개신교는 단 한 번도 큰 부흥의 전기를 맞은 적도 없다.
실망감을 안고 박물관을 나서 느와용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가 헌신했고, 그 영향으로 칼뱅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신앙의 터전이었던 그곳은 파리의 노트르담에 버금가는 위엄을 자랑했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내 영혼이 저절로 하늘로 승천하는 것 같은 황홀하게 아름다운 이 공간을 보며, 나는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고딕 건축양식은 신앙과 이성을 조합하려는 중세 신학의 지향점을 완벽히 표현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기둥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경외를 드러내며, 그 기둥들의 끝이 만나는 아치(Pointed Arch)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상징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각과 조명, 기둥과 곡선, 빛과 창문이 주는 그 완벽한 대칭과 조화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적 경지임이 틀림없다.
“하나님, 당신이 만드신 인간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죄성을 벗어나지 못해 끔찍한 일을 그렇게도 많이 저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 양식을 빚어내어 천 년의 세월 동안 당신을 예배하는 거룩한 유산을 남겨놓지 않았습니까?”라는 감탄과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올려졌다.
조용한 대성당에 앉아 이 마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
본격적으로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던 1534년, 칼뱅은 고향 마을인 느와용으로 돌아와 느와용 교회로부터 받은 성직록과 가톨릭 모든 교회 및 성직자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칼뱅은 개신교도로 전향한다는 양심선언이자 고향 마을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앙굴렘(Angoulême)의 개신교인이었던 루이 뒤 티에(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무르며, <기독교강요>를 구상하다 2년 후인 1536년에 라틴어판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그렇다면, 칼뱅은 왜 개신교 신학의 위대한 대작을 쓰게 되었는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루터파를 옹호하고, 가톨릭에 대항하는 체계적인 신학적 무기를 정리하여,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1세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강요>의 서문에서 칼뱅은 이렇게 왕에게 간청하고 경고한다.
“… 폐하께서는 이 정당한 변호에 대해, 귀와 마음을 닫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지 않은 왕의 통치는 약탈(brigandage)을 실행하는 것입니다.”2)
당연히 그의 편지는 효과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초래했다. 결국 칼뱅은 개혁자들을 받아주는 안전한 곳인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조용히 학문에 정진하며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행하고자 스트라스부르그로 이동하던 중 황제의 군대가 지나갔기 때문에 칼뱅은 제네바로 우회해야 했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이 1536년 7월 제네바에서의 하룻밤 체류는 역사를 바꾸어 놓는 그런 순간이 되었다.
제네바에서 칼뱅을 알아본 어떤 사람이 기욤 화렐(Guillaume Farel)에게 그의 거취를 알린 것이다. 혼자서 열렬히 스위스 개신교 운동을 하고 있었던 설교자 화렐은 그길로 칼뱅을 찾아와 제네바를 위해 하나님이 당신을 나에게 보내신 게 틀림없다고 말하며, 제네바 개혁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칼뱅은 자신이 비사교적인데다 부끄럼을 잘 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숨어 지낼 곳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화렐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 칼뱅은 화렐에게 자신의 목표는 그저 평화롭고 철저히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이유도 설명했다.3)
하지만 화렐은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선언했다.
“만약에 당신이 제네바에 남아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학자로서의 삶을 저주할 것…”
마침내 칼뱅은 화렐에게 설득되어, 제네바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는 그때를 생각하며, “마치 하나님이 높은 곳에서 그의 손을 뻗어 나를 체포하는 것 같았다.”라고 고백했다.4)
이 대목에서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감리교인으로서, 또 감리교 신학을 사랑하는 목사로서 나는 칼뱅 신학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강력한 “섭리”에 내맡겨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뱅의 제네바 사건은 확실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예정”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예정론>은 그의 철학적, 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 아닌, 자신의 인생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에겐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깊이 탐구해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그가 어떻게 제네바 도시를 그렇게 훌륭한 공동체로 만들었는지 그 비결이 그 대작 속에 담겨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발길은 이제 파리로 돌아와 생제르맹록세루아 교회(Église Saint-Germain-l'Auxerrois)의 종탑을 마주하고 서 있다.
루브르 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한 이 교회의 종소리가 생바르텔레미의 대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알려진 곳이다.
1572년 8월 24일 새벽 3시, 종탑에서 울려진 종소리를 신호로 파리의 성문들이 잠기고, 결혼식 참석차 성안에 들어온 모든 위그노(개신교도)가 학살당했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만들어 나가자는 약속을 굳게 믿고, 결혼식 초대에 응해 방문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약속을 배반당하고 처참한 결과에 마주하게 되었다.
길바닥은 시체로 가득했고, 강물은 핏빛으로 변했으며, 왕궁의 문과 창문들은 튀어 오른 피로 얼룩졌다고 한다. 파리에서만 약 6천 명의 사람들이 학살되었고, 그 외의 작은 도시들에서도 수천 명이 살육당했다고 전해진다.5)
이날 이후, 1598년 낭트 칙령에 따라, 비록 파리 밖에서지만 개신교도들의 자유로운 예배가 공식화될 때까지 프랑스는 끔찍하고도 오랜 종교전쟁을 겪어야 했다.
다시 생제르맹 성당으로 돌아와, 나는 성당의 육중한 문을 열고 예배당에 들어섰다. 마침 주일 미사의 끝자락에 성찬식 예전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전통적인 성례전에 따르면, 성찬을 받기 전 회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저들은 과연 어떤 회개 기도를 했을까 궁금해졌다. 수백 년 전, 가혹하게 위그노들을 처단했던 사건에 대해 진심을 담아 개혁교회 신앙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고백을 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생제르맹 성당을 나서는데, 문득 질문 하나가 나를 사로잡는다.
500년 전 프랑스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 21세기 교회도 또 다른 종교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의 아픈 역사와는 달리 서로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개혁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Divine Initiative)과 인간의 결단력(Human Initiative)이 연합하여 성취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주 1) 이극범, “칼뱅의 생가를 찾아서”, Hansori, 2002년 3월. 18쪽
2) Prefatory Address to King Francis,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NcNeill, 1960, vol 1, p.11-12.
3) “Christianity: A Social and Cultural History” ed. Howard Clark Kee, 1998. p.288.
4) Howard Clark Kee, 288.
5) Howard,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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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규 목사는 뉴잉글랜즈 연회 소속으로 버몬트주에 위치한 Grace United Method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tkim@umnees.org로 이메일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더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