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전쟁입니까?”

[아래는 연합감리교회 총회사회부와 평화위원회가 워싱턴 디시에서 함께 주최한 한반도 평화포럼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Forum) 개회 예배 정희수 감독의 설교 전문(한어 번역)입니다.]

마태복음 5:3-9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께 복음을 전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동역자로 헌신하고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총회사회부(Church and Society)와 평화위원회 임원진이 시기적절하게 포럼을 준비해 주심에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께 어려운 말씀을 전하려고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그동안 행해왔던 일들과 마땅히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던 일들의 결과로,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고 있음을 지적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외치던 사람들에 대한 묘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과 경험한 모든 일들 후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직 작은 진리나 지속적인 평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전쟁과 폭력과 분열과 피바람과 말살에 대해 두려움을 경험해 온 21세기의 지구촌에 살면서, 우리는 왜 아직도 평화와 화합과 정의와 긍휼의 가능성을 우리의 핵심적 가치관으로 삼지 못하는 것일까요?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평화를 아주 핵심적인 가치관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면서, 어찌하여 종교적 갈등과 종교적인 편협성 때문에 서로 폭력을 야기하고 분열된 삶을 살고 있을까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담긴 너그럽고 사랑스러운 감정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에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문제와 해결책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사고가 이 시대에 분열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사고를 통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영웅과 악당을 구별시키고, 온유한 자와 강한 자, 울며 슬퍼하는 이들과 축하하며 기뻐하는 이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구별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좋으냐 나쁘냐,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며,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라서며 상대방을 판단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를 화평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담겨있는 해결책은 매우 고결합니다. “복이 있는 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brk” (bruk이라 발음함)은 서로 다름 속에 무릎을 꿇는 것; 즉, 공경하며, 겸허함과 존중을 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히브리 신앙의 핵심적 가치로 여겨왔습니다. 긍휼, 정의, 온유, 겸손—이러한 면들은 이상적인 바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지에 대한 틀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전쟁과 전쟁에 대한 소문과 더 자주 일어나는 무자비한 폭력들을 매일 마주하고 삽니다. 특권이 있고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매우 드물고, 그저 어쩌다 생기는 일일 수 있지만, 세상 대부분에는 이러한 일들이 매일의 실상입니다. 지난 60년 동안 한반도에는 전쟁이 현실이었습니다. 1950년에 시작된 전쟁이 1953년의 휴전 협상을 통해 잠시 중단되었지만,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남한은 끝도 없는 무의미한 전쟁으로 인해 분열되고 갈라졌습니다. 전쟁은 지배하고 명령하기 위해, 또한 이미 오래 잊혀진 가치관과 이상들을 지켜내기 위해 힘과 능력 있는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힘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전쟁을 선포하지만, 그러한 전쟁들이 누구를 위한 싸움입니까?

많은 경우 자유, 정의, 애국심, 조국과 정의라는 명분이 전쟁의 이유를 설명하고 전쟁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치르는 전쟁의 대가와 그 여파를 살펴볼 때, 전쟁을 통한 숭고한 뜻이 드러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전쟁은 정의, 긍휼, 은총, 친절과 사랑 보다는 주로 욕심, 이기심, 권력의지, 자기 중심주의와 위신을 세우기 위해 일어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도리어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미천하고, 긍휼하고 정의로운 이들을 위해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화평하게 하는 이들을 거스르고, 우리 중 가장 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사람들을 아프게 합니다. 전쟁은 버림받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시작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평화와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로 화평을 꼽았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함께 화평은 진정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총체적인 성향이 겉으로 보이고 만져지게 표현되는 결정체란 사실입니다. 열매는 듣기 좋은 개념이나, 좋은 생각이나, 수동적인 이상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맺게 되고,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들의 믿음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열매에는 수동적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능동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평화를 세워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위기의 현실 가운데 우리는 평화의 십자군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지는 문구로 관심을 잃거나 불쾌해질 수도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전쟁과 편협성이 세상을 다스리던 극심한 폭력과 잔인함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역설과 도전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십자군의 정신에 못 미치는 그 어떤 노력도 오늘날 우리 세상에 필요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좋은 예가 됩니다. 화해와 치유를 위한 큰 노력이 제안되거나 실행되기도 했고, 우리의 에너지를 다른 데로 돌리고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되는 다른 일들이 계속해서 생기고 있습니다. 평화는 뒷전이 되고, 우리가 믿기에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의해 부차적인 일로 여기곤 합니다.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계속 변하지만, 구차한 변명과 방향 전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평화와 통일이 가장 최우선이 되기 전에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군”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는 “십자가로 표시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지만, 모순적인 죽음과 파괴, 형벌과 모욕의 상징인 십자가가 우리에게 믿음의 상징, 즉 지조와 희생,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권력과 나라들을 도전하고 물리쳐,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 평화와 정의의 길을 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왕국(kingdom)이 하나의 가족(kin-dom)이 되었고, 적개심으로 우리를 갈라놓았던 벽들이 무너졌습니다.

십자군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헌신에는 일편단심입니다. 그리고 평화의 십자군에 대한 긴급한 필요는 분명합니다. 평화를 세우는 일은 부차적인 임무가 될 수 없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일은 나중에 추가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세상에 미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평화를 위한 헌신이 우리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북한과 남한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화평하게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와 이라크도 기다릴 수 없습니다—평화가 필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미국 내의 젊은 흑인 청년들도 기다릴 수 없습니다—그들의 삶은 지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의 거리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길목에서 일어나는 총기 사건의 희생자들도 기다릴 수 없습니다—다음 비극이 곧 일어나려 합니다. 우리는 “평강하다, 평강하다”외치기만 하며, 폭력과 가식과 정치적 조종과 대책 없음에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John F. Kennedy는 “평화는 매일, 매주, 매달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써, 우리의 의견을 조금씩 바꾸고, 전에 세워졌던 장벽들을 조금씩 점차 부식시키고, 조용히 새로운 구조들을 세워가는 일”이라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러한 과정이 일어나도록 기다릴 시간이 있습니까?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평화의 진화는 우리 현대사회의 도전들을 다루기에 맞지 않게 천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나이지리아의 인권운동가 Hafsat Abiola는 “평화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부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가진 최선과 우리의 전부를 기여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최선과 전부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일도 포함합니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가진 최선과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일”을 촉구하는 그녀는 평화의 십자군입니다. 우리의 최선과 전부에 못 미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구촌에 평화보다 더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다른 일들로 돌릴 수 없습니다.

대강절을 준비하면서, 우리 메시아의 다른 이름 중 하나인 “평강의 왕”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평강의 왕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며,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그 평강의 왕의 대사이자 주창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강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지니고 가야 할 메시지이고, 의미이며, 명령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특별하지 않거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The Nuclear Age Peace Foundation의 Peace Leadership Director인 Paul Chappell은 평화의 십자군들이 어떠한 모습을 지녀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움이 되는 통찰을 제시합니다. “이전에 있던 전쟁의 패러다임을 평화를 이루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의 이해 경계선을 옮겨 놓는 일에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폭력의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이상의 큰일을 할 수 있는 평화의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우리의 걸작품으로 만드는 화가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세우는 일은 예술이고 과학이며, 소명이고 직업이자 사명이며, 우리의 헌신과 인생 일대의 중요한 일이 하나로 합쳐진 종합적인 의무입니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부를 다해 헌신해야 합니다.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전쟁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로서 평화를 위해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파괴하고, 헐뜯고, 반박하고 파괴하여 분열을 초래하는 우리의 미사여구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편협함, 격분, 침략과 증오에 불을 붙이는 폭력과 복수와 경계와 속된 언어에 강력하게 반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애국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만 합니다. 미국의 예외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삶, 경제적인 격차, 정당 정치 및 개인의 권리가 우리를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최고가 되려는 노력보다,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애국심은 공공의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계의 시민 중 더 많은 이들에게 안전과 안보와 안락함과 돌봄을 제공해 주기 위한 최고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이러한 혜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판단하는 그 어떠한 담도, 분열도, 구별도 없이—그저 모든 사람에게 정의를 보장해 주는 평화를 위한 끈질긴 헌신만 필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전쟁의 먹구름과 전쟁의 위협 아래 살고 있습니다. 작가 한강은 “No War in Korea”라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매일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한국인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 묘사합니다. 전쟁의 위협 속의 무고한 시민들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한 오싹하면서도 진지한 통찰을 전해줍니다. 그녀는 “모든 전쟁과 학살 속에는 사람들의 국적이나 인종, 종교 혹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을 ‘인간 이하’로 보는 중요한 개념에 있다”고 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인성뿐 아니라 신성까지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을 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말에 대한 묵상으로 마치려 합니다. “비폭력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별다른 방안이 없다고 억압과 폭력에 의지하지 말고, 인류가 억압과 폭력을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가 인간의 모든 갈등과 충돌에 대처하는 방법이 반드시 진화하여 복수와 침략과 보복을 거부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의 바탕은 사랑입니다.”

평화를 위한 헌신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믿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랑은 이 땅의 전쟁, 증오와 폭력에 평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한 유일한 능력입니다. 평화를 폭력적으로 강요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사람들의 더 나은 본성에 호소하는 것—더욱 친절하고, 더욱 정의롭고, 더욱 돌봄이 있는 세상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이룩하고, 화평을 창출하고, 평강을 회복하고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연합감리교회가 지금부터 평화를 위한 세계적 십자군의 행렬을 선도해 나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설교 전문 (영문)

올린날: 2017년 11월 1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사회적 관심
에두아르트 벤데만(Eduard Bendemann)의 원화를 본뜬 목판화(1872). 출처, Flickr.com.

동성애에 관련한 나의 신학 여정 2: 기원전 587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이성호 목사의 동성애와 관련된 신학 여정 2부로 동성애 문제에 관한 신명기적 제사장 학파와 예언자 학파, 생물학적 자손과 믿음의 자손의 입장 그리고 모세 오경과 지혜문학의 입장을 살펴본다.
개체교회
아랍 색채가 뚜렷한 몬레알레 대성당의 한쪽 외벽면. 사진 제공, 이형규 목사.

시칠리아 순례 2: 독서와 여행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곳

이형규 목사는 수천 년의 문화와 문명이 숨 쉬고, 삶의 예술이 적용되며, 독서와 여행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시칠리아에서, 공생과 공존의 가치를 깨닫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사회적 관심
제임스 티소 작, 포로들의 대이동. 출처 Wikimedia Commons.

동성애에 관련한 나의 신학 여정 1

이성호 목사의 동성애에 관련한 신학 여정 1부로 이글에서 저자는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규정들은 바빌론 유수로 잡혀간 이들이 민족의 존폐라는 위협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성애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음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is an agency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2024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