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전해야 할 설교는? 그리고 마리안 에드거 버드 감독의 설교

누가복음 4:14-30

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예배 중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

저는 한국에서 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첫 설교를 했습니다. 한국 나이로는 스무 살이고, 만으로는 아직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장차 목사가 될 테니 어린이부 설교를 한 주 맡아서 해보라는 담당 목사님의 생각이었지요. 얼마나 떨렸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짐작하실 것 같습니다.

몇 달을 고민한 후 저는 마침내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이 나누는 대화를 설교할 내용으로 정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입니다. 어린 마리아가 예수님의 임신 소식을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주의 종이 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마리아의 담대한 믿음에 대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백여 명이 되는 아이들의 집중을 10분(어린이부 설교는 10분이었습니다.) 동안 잡아 놓을 자신이 없어서 저는 손 인형을 들고 말씀을 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손에 뭐라도 끼면 애들이 좀 봐줄까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귀여운 천사 손 인형과, 마리아 손 인형을 구입해서 틈날 때마다 설교를 연습했습니다. 몇 달을 연습했던 것 같습니다. 아주 달달 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설교 날이 다가왔습니다.

양손에 가브리엘 인형과 마리아 인형을 하나씩 끼고 강대상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안을 둘러보았지요. 백여 명의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백여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공황 상태가 되었습니다. 반짝거리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호러 영화처럼 보일 줄은 몰랐어요.

다행히 설교를 연습한 보람은 있어서 어떻게든 마리아와 가브리엘의 대화를 무사히 끝냈습니다. 강대상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말 손톱만큼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저 끝났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얼마나 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썼는지 쓰고 있던 안경은 뿌옇게 김이 서리고 강대상을 내려올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난간을 붙잡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완전히 탈진 상태였습니다.

예배 후,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주일학교 선생님들, 교장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제 어깨를 두드리며 “정말 잘했다, 첫 설교인데 정말 대견하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 그래도 꽤 잘했나 본데?’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거렸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곧이어 저의 첫 설교를 들으러 몰려와 있던 친구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제 설교의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시작은 멀쩡하게 잘했으나, 엄청나게 긴장을 한 제가(친구들의 눈에는 심장마비 온 사람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와 가브리엘 인형을 헷갈리기 시작해서, 결국 이야기는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너는 열 달 후에 아들을 낳으리라!”라고 선언하고 가브리엘 천사가 결연하게 “주의 종에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다!”라고 대답하는 걸로 마쳤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을 우리에게 낳아주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교회도 안 가고 싶을 정도였어요. 다행히 아이들은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아서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소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이들이 제대로 듣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거하게 망쳐먹은 설교를 듣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잘했다, 대견하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들의 사랑을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어린 신학생이 좋은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거창한 실수도 사랑으로 감싸주신 그 마음에 저는 아직도 마음이 찡합니다. 하나님이 사랑 많은 교회들에 복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 경험은 저와는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그가 자란 나사렛에서 전한 첫 설교에 대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4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완전 생짜 첫 설교’는 아닙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40일 광야 생활을 거친 후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이야기를 해 주거든요. 그러나, 어쩐 일인지 누가는 예수님 사역의 시작을 가리키는 그 신호탄으로서 오늘 예수께서 자기 고향 마을의 회당에서 전한 말씀을 그의 첫 설교로 비중 있게, 설교의 내용과 설교 후 예수님께 일어난 일까지 모두 포함해서 자세히 4장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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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예배를 보면 설교자를 ‘화자’ 또는 ‘이야기꾼’이라는 의미의 ‘다샤님(Darshanim)’이라고 칭합니다. 다샤님은 꼭 랍비이거나 전문 종교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해석에 권위가 있는 성인 남자라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요. 예수님의 시대에 다샤님은 오늘날 우리가 설교에서 하는 것처럼 성경 구절을 당대의 종교적, 정치적, 윤리적 관심사에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식일에, 예수님이 다샤님으로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셨던 거죠. 예수께서 앞으로 나오시자, 회당 지도자가 예수님께 두루마리를 건넵니다. 예수님은 지난주 낭독이 끝난 곳을 찾았습니다. 그러고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읽은 부분을 누가가 기록해 두었는데, 한 번 더 읽어볼까요.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시력 회복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읽으신 구절이 단순히 성경의 한 구절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구절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6절을 읽고는 61장 1-2절로 뛰어넘어 간 다음, 레위기 25장의 희년에 대한 언급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말씀을 혼합해서 읽으셨던 것입니다.

회당 지도자가 예수님께 드린 두루마리는 단 하나뿐이었고, 두루마리 하나는 구약의 책 한 권을 의미합니다. 그냥 읽으셨으면 됐을 텐데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요? 예수님도 제가 마리아와 가브리엘을 혼동했을 때처럼 긴장해서 혼동하셨던 걸까요?

아니면, 일부러 예수님께서 성경의 세 구절을 섞어서 읽으셨던 걸까요?

글을 읽으신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말아 시종에게 다시 건네주셨습니다. 회당은 조용해졌습니다. 모든 시선이 예수님께 고정되어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이 말씀은 희망, 정의, 구원이라는 강력한 약속을 담고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습니다.

‘예수는 무엇을 이야기할까? 우리가 지금 겪는 어려움에 관해서 이야기할까? 로마 군인이 우리를 못살게 구는데, 언젠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나? 아니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갈릴리에 많다던데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나?’

사람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가 들음으로 성취되었느니라. (Today this Scripture has been fulfilled in your hearing.)”

청중은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주님의 영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요?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포로들이 풀려나고, 눈먼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요? ‘지금’이 주님의 은총의 해라고요?”

“세상에, 요즘 뉴스 보셨어요?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아세요? 그 어느 때보다 불평등, 불의, 질병, 폭력이 많아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이런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는 건가요? 제정신인가요?”

그러나 사실 처음에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모두 그를 칭찬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에 놀랐다.”라고 알려줍니다. 물론 칭찬하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그의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 소년에게 예의를 갖춘 것일까요? 마치 제 모교회 어른들이 무턱대고 저를 사랑으로 칭찬해 주셨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설교를 시작할 때는 “아유 잘하네!”하며 감탄하던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정작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는 감탄에서 분노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웃들은 그를 절벽 아래로 던지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와서 예수의 부모가 누군지까지 아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대체 예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셨길래 이렇게까지 분노한 걸까요. 예수께서 뭐라고 설교하셨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가버나움에서 나는 설교하고 병자를 고쳤으니, 여러분은 내가 여기 내 고향에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자신을 스스로 고치십시오.”라고 말씀하시면서요. “하지만 옛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가뭄으로 인한 기근으로 고통받을 때 시돈 지방의 한 이방인 과부를 기근에서 구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또 다른 이방인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질병을 고쳤지만,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도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나사렛 유대인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회당 한가운데 앉아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구원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발언이지요.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허락되었다고 믿었거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편애하신다고요.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멸시해 마지않는 이방인도 사랑하셨고 심지어 그들에게도 구원이 열려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냈습니다. 시돈 지방의 과부 이야기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 모두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지만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을 끝 벼랑으로 끌고 가려고 밀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마을을 떠나셨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은 그 이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저와는 참으로 다른 예수님의 첫 설교 경험입니다.

2025년 1월 21일, 우리는 또 다른 첫 설교를 목격했습니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성공회 마리안 에드거 버드(Mariann Edgar Budde) 감독이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후, 그와 미국 지도자들 앞에서 첫 설교를 전했습니다.

많은 분이 감독님의 설교를 전부 또는 일부를 듣거나 읽으셨을 것 같습니다. 감독님은 설교에서 자비를 촉구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나그네와 이방인을 치유하신 하나님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민자들과 성소수자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설교와 버디 감독님의 설교가 같은 진리, 즉, 멸시받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유와 구원을 선포하는 사랑의 마음, 즉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촉구한다고 믿습니다.

제게는 나사렛에서 예수를 절벽에서 던지려 했던 사람들과 2000년 후 오늘날 감독의 메시지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가진 듯이 보입니다. 만약 그들이 설교를 쓴다면 어떤 설교를 쓸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이스라엘만 사랑하고 이방인은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 혹은 돈 많은 소수의 백인 특권층만 사랑하고 제대로 체류 신분이 갖추어지지 않은 불법체류자들은 돌보시지 않는 하나님, 아니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결혼은 축복하고 성소수자들은 정죄하는 하나님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인 걸까요? 이방인들, 잊힌 자들, 멸시받는 자들을 꾸준히 사랑으로 택하고 부르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인데 말이에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의 삶이 설교라면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선포할까요?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이라는 설교에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을, 포로 된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두렵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전하는 설교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변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자비와 희망, 해방을 선포하는 첫 설교, 살아있는 설교가 되어봅시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 주의 말씀이 실현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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