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포인트:
- 아이작 브라운 목사가 짧은 암 투병 끝에 향년 48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 브라운 목사는 라디오, 사진, 글쓰기, 편집, 번역 등을 통해 아프리카의 소식을 나누며, 연합감리교회를 위한 아프리카 공보관으로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 브라운 목사는 밴더빌트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고국인 코트디부아르로 돌아가 개체교회 담임목사와 기자로 사역했다.
교단 소통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기자이자 목사였던 아이작 브라운 목사가 지난 5월 5일 짧은 암 투병 끝에 소천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고국인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뿐 아니라 전 세계 연합감리교회는 브라운 목사를 예수와 동행한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브라운 목사가 여러 직책으로 보좌했던 코트디부아르 연회의 벤자민 보니(Benjamin Boni) 감독은 “브라운 목사는 단순한 동료 목사가 아닌 아들 같은 존재였습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삶과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던 그의 믿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삶의 산 증거가 되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코트디부아르 연회 공보 디렉터인 도미니크 타요로(Dominique Tayoro)는 브라운 목사 사역의 발자취가 코트디부아르 연합감리교회 공보부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브라운 목사가 연회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 설립에 공헌했다고 밝혔다.
타요로는 또한 브라운 목사를 이웃을 위해 봉사한 하나님의 선물과도 같은 선한 사마리아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목사 가운을 벗고,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 같은 브라운 목사님은 저희 사역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였습니다. 그는 세심한 귀와 항상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열린 손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브라운 목사는 보니 감독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두 교회를 섬기고, 자신이 속한 연회 공보 활동을 지원하고, 프랑스어 연합감리교뉴스와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사역을 총괄했다.
“아이작 브라운 목사는 자신의 사역과 삶에서 복음의 희망과 사랑을 실천한 열정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여러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면서도 각 분야에 전적으로 헌신하며,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연합감리교 공보부의 최고 책임자 댄 크라우스(Dan Krause)는 말했다.
“그는 코트디부아르 연회와 공보부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공보부 동료들을 대표하여 그를 잃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크라우스는 말했다.
아이작 돈코 코우아씨 브라운(Isaac Donko Kouassi Broune) 목사는 사싸코-베그니니에서 어부였던 존 로버트 브라운(John Robert Broune)과 생선 장수였던 에시 코우마(Essi Kouma)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그는 밴더빌트 신학교 논문에 이렇게 썼다.
“저의 소명은 제 부모님의 직업을 다른 바다에서 이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어, 그들을 창조주이신 주님께 인도하고 싶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로마서 10:14b -15a).”
로마서의 이 구절은 브라운이 자신의 집 벽에 액자를 만들어 걸어두고, 자신의 자동차 번호판도 Rom1015라고 정할 만큼 가장 좋아했던 구절이다.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와 올해 2월 세상을 떠난 브라운 목사의 부모는 그에게 감리교회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었다. 브라운 목사는 17세에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고, 이후 평신도 설교자(Licensed Lay preacher)로도 섬겼다.
아비장-코코디대학교(University of Abidjan-Cocody)에서 수학하는 동안 브라운은 동급생인 에르베 쿠투안(Hervé Koutouan)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1996년 수업 첫날 만났습니다. 아이작은 감리교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입고 있었습니다."라고 아비장에서 저널리스트가 된 쿠투안은 회상했다. “아이작과 저는 자석처럼 바로 가까워졌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졸업 후 브라운은 당시 코트디부아르 개신교 감리교회의 공보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소속 교단이 연합감리교회에 합류한 후, 브라운은 다양한 공보 담당 사역자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연합감리교 공보부와 협력하며 사역했다.
“연합감리교 공보부가 미국을 비롯해 아프리카, 아시아, 중부 및 동유럽 등 해외 지역에서 연합감리교회 공보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해외지역총회커뮤니케이션이니셔티브(Central Conference Communications Initiative)를 시작했을 때, 브라운 목사는 이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관계 구축과 핵심 인물 발굴 및 교육 제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라고 당시 공보부 총무였던 래리 홀런(Larry Hollon) 목사는 말했다.
브라운은 2006년 짐바브웨 무타레에 소재한 아프리카대학교에서 2주간 열린 첫 아프리카 전역의 공보관(Communicators) 교육에 참여했다.
현재 텍사스 연회를 섬기고 있는 신시아 하비(Cynthia Harvey) 감독은 그를 겸손한 하나님의 종으로 기억했다.
“우리의 관계는 2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저는 공보부가 아프리카대학교에서 주최한 아프리카 공보관 훈련에서 젊은 아이작 브라운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아이작에게서 겸손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았고, 우리는 즉각적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은 예언적이고 성스러운 만남이었습니다. 이후 텍사스 연회와 코트디부아르 연합감리교회가 파트너십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제가 코트디부아르를 방문할 때 그는 저의 통역사가 되었습니다. “
브라운은 해외지역총회 커뮤니케이션 이니셔티브를 통해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는 데 기여한 핵심 인물이었다고 홀런 목사는 말했다. '희망의 목소리(La Voix de l’Esperance)' 라디오 방송국은 2010년에 개국했다.
“이 방송국 개설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이루어진 최초의 시도였으며, 전 세계의 다른 환경에서도 이를 따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브라운의 사역은 연회 신문인 르메소디스트(Le Méthodiste)와 가나감리교타임즈 특파원 등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2012년에는 연합감리교뉴스의 요청으로 총회 중 프랑스어 뉴스 데스크를 맡게 되었는데, 그는 그때가 자기 인생의 정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의 정점은 몇 달 후인 2012년 7월 7일 아비장에서 디앙 배기아 입스(Diane Baguia Epse)와 결혼하면서 최고조에 달했고, 2015년 1월 그들에게 아들 제이슨 마이크가 태어났다.
2015년 말, 브라운은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밴더빌트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내쉬빌에 올 때 그는 모든 교수진과 동료 학생들을 위한 선물을 들고 왔다. 당시 신학교 학장이자 여성 윤리와 사회, 성(gender), 그리고 성정체성 연구 분야에서 저명한 교수였던 에밀리 타운스(Emilie Townes) 교수는 그의 멘토가 되었다.
지금은 명예학장이 된 타운스 교수는 브라운 목사를 이렇게 기억했다.
“밴더빌트 신학교 교수진은 아이작을 놀랍고, 회복력이 강하고, 사려 깊고, 친절하며, 겸손하고, 사랑스럽고, 관대하고, 배울 줄 알고, 희망이 넘치는 유쾌한 학생이자 언론인이라고 묘사하곤 했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구보다 신실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와 함께 멋지고 따뜻한 빛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의 존재로 인해 복을 받았으며 그 빛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브라운의 믿음과 기쁨은 그의 이메일에 첨부되어 보내진 글에 잘 반영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세요. 하나님은 항상 무언가를 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라는 확신에 찬 문장이 그의 이메일 첨부되곤 했다.
밴더빌트에 다니는 동안 브라운은 연합감리교 공보부와 제자사역부의 다락방에서 일했다. 그는 연합감리교 공보부의 연합감리교뉴스에서 프랑스어 뉴스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고, 2018년에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연합감리교뉴스를 계속 섬겼다.
“아이작은 다락방과 제자사역부에서 수년간 현장 교육을 받는 동안 열정적으로 배우는 학생이었습니다.”라고 전 다락방 출판 담당 이사인 로빈 피핀(Robin Pippin)은 말했다.
브라운은 아프리카 지역 신학교들을 돕기 위한 전자책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매일 묵상집인 다락방에 글을 쓰기도 했으며, 엠마오로 가는 길(Walk to Emmaus)과 같은 영적 훈련에 참여하고, 제자사역부의 교회 개척과 예배 관련 자료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이작은 제자사역부와 다락방 사무실 직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피핀은 말했다.
코트디부아르로 돌아온 후 브라운은 그 나라 최초의 커뮤니케이션 담당 채플린으로 임명되었고, 2020년 그를 지도해 준 예드 앙고란(Yed Angoran) 박사가 사망하자, 암고란 박사가 담당하던 감독 보좌관의 역할도 맡게 되면서, 그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듬해, 브라운의 오랜 바람대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의 오랜 친구인 쿠투안은 “아이작은 주님을 깊이 사랑했고, 2021년 12월에 그가 목사로 안수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요, 감사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쿠투안은 “그는 여러 업무를 감당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두 교회의 목사로서의 직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기쁨으로 섬겼습니다.”라고 말했다. 브라운 목사는 아비장 남부 지역에 있는 연합감리교회인 시테드페다나니(Cité de Paix d’Anani)교회와 베델교회 두 곳을 섬겼다.
한편, 그는 희망TV(Esperance TV)의 설립에 의견을 제공하는 등 연회 공보 활동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사진작가로서 에볼라 발병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에 관한 기사에 쓰인 사진들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2021년 출간한 그의 회고록 표지에는 그가 사제복을 입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실려있다.
“'Me Voici(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널리스트의 열정, 목사의 소명"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그는 기자로서의 소통과 목회자로서의 섬김이라는 두 가지 열정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열정은 그를 사진 전문 교육자로 만들었으며, 연합감리교뉴스와 협력하여 뉴스 작성과 사진 촬영을 지도하기도 했다.
하비 감독은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겸손한 하나님의 종인 브라운 목사의 죽음으로 연합감리교회 전체 리더십에 공백을 만들었으며, 우리의 마음에도 공백을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브라운 목사의 유족으로는 아내 디앙과 아들 제이슨 마이키가 있다. 브라운 목사의 장례 일정은 아비장에서 그의 삶을 추모하는 입관예배가 5월 15일에, 장례식이 5월 24일에 예정되어 있으며, 미국에서도 그의 추모예배를 가진 예정이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