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거의 매일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됩니다. 코로나19 대유행병이 발병한 이후 미국 내 아시안에 대한 혐오 범죄가 뉴욕의 경우 833% 증가하였고, 이러한 뉴스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는 우리 교인들과 가족들을 불안케 만드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몇 주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시안 혐오 범죄 철폐 시위에 한 어린아이가 들고 있는 “할머니를 때리지 마세요!”라는 피켓을 보고 저는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난 3월 16일 아틀란타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에 분노하고 아파했습니다. 사망자 8명 가운데 6명이 아시아 여성이었습니다. 그 주 타임지는 캔디 랭(Candy Lang)이 쓴 “반아시아 폭력을 지닌 미국 유산에 마주하다(‘Confronting America’s Legacy of Anti-Asian Violence’)”라는 기사를 머리기사로 실었습니다. 그 특집 기사의 첫머리에 랭은 사회언론 전문가인 마크 김(Mark Kim)이 쓴 “이번 아틀란타 비극의 배경에는 인종 차별, 성차별, 계급 차별 및 미국의 역사 전통에 담겨있는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화와 폭력이 교차하고 있다.”라는 글을 인용했습니다. 기사는 이 문제의 핵심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시안 차별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이 땅의 사람들에겐 팽배합니다. 1882년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이 ‘중국인 차별법(Chinese Exclusion Act)’을 서명한 이후, 1942년에는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적성 외국인으로 간주하여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고 감금했습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백인 경찰에 대한 인종차별 시위는 결국 한인타운 상가를 파괴하는 폭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종국에 코로나 대유행과 맞물리면서 아시안에 대한 혐오 범죄를 급증하게 만들었고, 지난 3월 아틀란타 총기 난사 사건을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아시안을 향한 혐오 범죄는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이런 범죄들이 많은 경우 정신적 문제가 있거나 노숙인들과 같은 미국 사회에서 소외된 사회경제적 약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그들이 자신보다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두도 못 내던 못되고 나쁜 짓들을 아시안 노인들이나 여성들에게 분풀이로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후러싱의 동네공원에서 13세의 한인 소년이 같은 또래 아이들에게 인종차별적 욕을 듣고 구타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도대체 왜 이 땅에는 아시안들을 함부로 차별해도 된다는 생각이 만연할까요?
어쩌면 아시안들은 누가 괴롭혀도 참고 견딘다고 여기며 만만하게 생각하는 문화적인 문제나 모범적 소수 인종의 신화(Model Minority Myth)로 미국인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같은 차별이 개인들 간의 차별이 아닌 미국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제도적인 차별이며, 인종차별과 혐오로 인한 문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이번 아시안 혐오 범죄 사건들은 우리에게 어떤 공동체도 자신이 소속된 그룹끼리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강하게 인식시켰으며, 아시아계 미국인 공동체를 비롯해 인종차별을 당하는 모든 유색 인종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미국이 더 큰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기회와 정치역량을 모으는 모멘텀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1975년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는 정말 백인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학의 남학생 사교 클럽인 “social fraternity”에 가입해 그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1978년도 코미디 영화 “Animal Housed”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게 살면서 내가 그들에게 ‘형제(brother Kim)’로 지내는 것이 마냥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술을 잔뜩 마시고 지하실에서 당구를 치며 놀던 중 한 백인 친구가 내게 “너는 괜찮아. 너는 우리 중 한 명이야. 그런데 저쪽 기숙사에 사는 냄새나는 놈들은 싫다.”라고 말하며 한국과 인도 유학생들이 많이 살던 기숙사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아시안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백인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분노가 일어나 결국 그날 밤 그 친구와 대판 싸웠습니다.
나에게는 그처럼 인종차별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했던 백인 친구도 있었지만, 나의 대학 절친이자 룸메이트였던 백인 친구도 있습니다. 가끔 보고 싶었던 그 친구를 대학을 졸업한 지 40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나는 그 친구에게 “학교 다니던 그 시절에 왜 나와 그렇게 친하게 지냈어? 라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대학교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엄청 겁이 났었어. 시골에서만 살다가 도시 생활을 하려니 익숙하지 않아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는데, 너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편하게 해줬거든.” 그 친구는 키가 크고 공부도 잘했는데, 도시라는 새로운 환경과 대학 캠퍼스 자체에서 오는 불안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키도 작고 영어도 못 했지만, 자신을 그대로 받아주던 내가 친구라는 것이 그리 편하고 좋았다는 말에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왔고, 닮은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진 서로를 보듬어주며 최고의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한인 제과점에서 덩치가 엄청나게 큰 백인 남자와 내가 끌어안고 반가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우리는 40년간 가끔 서로를 생각하며 많이 궁금해하고 그리워했던 보고 싶은 친구였습니다.
제도적 인종차별(institutional racism)은 현실이고, 백인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미국의 현실은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를 위한 모든 세력이 연합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또한 아시안 혐오 범죄 앞에 드러나는 노숙인들이나 사회의 약자들로 인한 문제와 저소득층 지역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빈도를 생각할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종적 문제 해결을 넘어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빈곤의 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 같은 사회, 경제적 차원의 정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대학 친구를 떠올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긴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생각하면서 나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문제의 해결 방안이 바로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고, 미움은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제시한 교회의 사회변혁을 위한 행동 강령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미가서 6:8절)입니다. 이 사회변혁을 위한 행동 강령을 실천에 옮긴 사람 중 한 명이 넬슨 만델라인데, 그는 남아공의 새 역사에 평화와 화해를 입히기 위해 그의 전임 백인 대통령이자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디 클락에게 부통령직을 맡깁니다. 더는 흑과 백이 죽고 죽이는 나라가 아닌 상생하는 나라를 꿈꾸었던 넬슨 만델라의 꿈에서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관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만델라가 어린 시절 감리교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을 거로 생각합니다.
아시안 혐오를 이기는 궁극적인 방안도 결국 너무 단순한 것 같지만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은 또한 교회가 선택해야 할 사회정의의 해결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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